[ 이런 세상에 살고 싶다...새 천년에는 ]

신경림

흙이 살아서 쌔근쌔근 숨을 쉬는,
나무와 풀 그 줄기를 타고 올라와
아름다운 꽃과 열매로 맺히는,
물 속에서는 온갖 살아 있는 것들이
곤두박질도 치고 달음박질도 해서
자꾸만 자꾸만 새로운 생명을 만들어내는,
그래서 금빛 햇살이 산과 들에 가득한,
사람들의 꿈과 노래가 온 하늘에 가득한,
마을과 저자가 온통
살아 있는 것의 향기로 가득한,
강에는 눈먼 고기가 없고
산에는 어깨 굽은 노루가 없는,
두루미와 토끼가, 오소리와 도요새가
서로 어울려 느린 춤을 추는,
사람과 짐승이 서로 위하고
물과 바람이 한데 어울려
하늘과 땅을 활기로 넘치게 하는,
매연이 가득한 도시와
소음으로 어지러운 거리가 없는,
죽어가는 강, 병든 산이 없는,
이런 땅에.

먹을 것 고루 나누어 먹고
입을 것 다같이 풍성히 입는,
남이 가진 것 탐내는 사람 없고
남이 지닌 것 빼앗는 사람 없는,
골목과 거리는 아귀다툼 대신
아름다운 노래와 즐거운
웃음소리로 가득한,
돈 없어 배우지 못하는 사람 없고
병원에 가지 못하는 사람 없는,
하고 싶은 일 못하는 사람 없고 돈 없어
뜻 굽히는 사람 없는,
사람이 사람을 괄시하지 않고
사람이 사람을 짓밟지 않는,
할 말을 다하고 할 일을 다 하는,
보고 싶은 것 보고 듣고 싶은 것 듣는,
자유롭게 생각하고
만나고 싶은 사람 만나는,
아무런 속박도 아무런 구속도 없는,
이웃이 슬플 때 함께 슬퍼하고
이웃이 아플 때 같이 아파하는,
나 잘 살겠다고 이웃 괴롭히는 일 없고
조금 편하자고 마구 산을 깎아내고
마구 강을 동강내는 일 없는,
이런 나라에.

사는 땅 사는 모양이 다르다고
힘없는 나라 못살게 구는 일이 없는,
함부로 이웃나라 침략하여
피가 피를 부르고 다시
피가 피를 부르는 일이 없는,
서로 철벽을 쌓고
총칼을 겨누지 않아도 되는,
마침내 장갑차와 탱크가 경운기가 되고
트랙터가 되는,
단 한 방으로 살아 있는 것들의 씨를 말릴
핵 따위가 아예 없는,
전쟁을 구실로 거리에서 아이들
굶어 죽이는 독재의 나라가 없는,
자기네만 잘 살겠다고 온 인류의 자원을
혼자서 독차지하는 나라가 없는,
피부색이 다른 사람들도 친구가 되고
말이 다른 사람들도 만나면 즐거운,
다르게 먹고 다르게 살아온 사람들끼리
행복하게 사는 길을 함께 찾아가는,
하찮은 생명, 작은 존재도 존경을 받는,
살아 있는 것 해치는 물건은 아예 자취를
감춘, 이런 세상에.

이런 땅에 이런 나라에 이런 세상에
살고 싶다, 새 천년에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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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약력 >

<> 충북 충주 출생(1935)
<> "문학예술"로 등단(1956)
<> 시집 "농무" "새재" "달 넘세" "길" "어머니와 할머니의 실루엣"
<> 만해문학상, 한국문학작가상, 이산문학상, 단재문학상, 대산문학상 수상
<> 동국대 석좌교수(현)

( 한 국 경 제 신 문 2000년 1월 1일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