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세기는 우리나라 주거문화의 혁명기였다.

도시계획 개념이 도입돼 체계적인 주택건설이 시작됐고 아파트라는 새로운
형태의 공동주택이 등장, 주거의 핵으로 자리잡았다.

초가와 기와집이 옹기종기 모여있는 마을만 있던 그 이전 시대에서는 상상도
할 수 없을 정도로 급격한 변화가 이뤄진 것이다.

우리나라에 근대적인 도시계획의 개념이 도입된 것은 1934년 조선총독부가
"조선시가지계획령"을 제정하면서부터다.

이 계획령은 서울을 비롯한 도시지역에 불량주택들이 무분별하게 들어서자
이에 대한 대응책으로 마련됐다.

조선총독부는 36년부터 이 법령에 따라 토지구획정리사업및 택지조성사업을
추진, 주택건설 희망자에게 택지를 공급했다.

당시 토지구획정리사업이 시행된 지역은 서울 평양 청진 등이었다.

서울에선 신촌(7만1천4백45평), 금호(13만94평), 한남(3만9천6백50평) 등에
주거단지가 조성되기 시작했다.

해방직후엔 일본및 중국에서 귀국하거나 이북에서 월남하는 사람이 늘어나
주택난이 심화됐다.

그런 상황에서 6.25가 발발, 당시 주택 재고의 5분의 1에 해당하는
59만6천채가 파괴됐다.

휴전후 정부는 미국국제협조처(ICA) 등 외국기관의 원조자금으로 주택건설에
나섰다.

주택공사 전신인 대한주택영단이 건설한 불광동(1백71가구), 홍제동(1백36
가구) 등 서울 변두리의 재건주택및 부흥주택 단지들이 대표적인 사례다.

이들 주택은 56년까지 10만가구나 건설된다.

이 시기에 가장 눈에 띄는 변화는 우리나라에 처음으로 아파트라는 주택형식
이 도입됐다는 점이다.

당시 민간 건설업체였던 중앙산업이 종암아파트 3개동(58년)과 개명 아파트
1개동(59년)을 건설했다.

1961년부터 1970년대초까지는 공업화에 따른 주택난 해소를 위해 정부가
대규모 아파트 단지 건설을 추진한다.

그 시초는 주택공사가 62년 건설한 마포아파트였다.

이 아파트는 우리나라 최초의 단지형 아파트(4백45가구)로 꼽히고 있다.

서울시도 69년부터 3년간 시민아파트 9만가구 건설계획을 추진했다.

그러나 이 계획은 70년 4월 와우아파트 붕괴사고로 32개지구 1만6천9백63
가구만 건설된채 중단된다.

시민아파트는 최소 건설비로 대량의 주택을 건설하는 것이 목적이어서
단지나 건물 계획이 체계적이지 못했다.

특히 도심지 주변 공유지인 산기슭에 주로 건설돼 서울시내 경관을
훼손했다는 비판을 받고 있다.

1970년대 중반부터 말까지는 경제성장을 토대로 아파트에 대한 투기수요가
급증한 시기였다.

민간건설업체들이 잇따라 주택건설사업에 뛰어들어 78년에는 아파트가
9만9천7백27가구나 건설된다.

이는 74년 아파트 건설량(1만9천4백39가구)의 5배에 해당하는 물량이다.

이때 서울 강남지역에 대한 대대적인 도시개발정책이 추진되면서 영동1지구
(51만평)와 2지구(3백90만평)가 택지로 개발된다.

반포 잠실 여의도 압구정등 11개 지구에 중고층 아파트가 대규모로 들어서
새로운 주거타운을 형성했다.

주거문화 무게중심이 주택에서 아파트로 기울어지는 시기로 볼 수 있다.

1980년대말은 6공화국의 "2백만호 건설계획"에 따라 신도시가 건설된
시기다.

분당(9만7천3백34가구), 일산(6만9천가구), 중동(4만2천5백가구), 평촌
(4만2천1백64가구), 산본(4만2천39가구) 등 수도권 5대 신도시를 중심으로
대규모 아파트단지가 잇따라 들어섰다.

단기간에 많은 물량이 건설돼 부실시공이란 부작용을 빚기도 했지만 국민
주거수준을 어느 정도 끌어올렸다는 점에서 대체적으로 긍정적인 평가를 받고
있다.

90년대 중반이후에는 "삶의 질"을 중시하는 시대 분위기에 맞춰 아파트외에
전원주택 고급빌라 등 다양한 주거형태가 도입됐다.

최근엔 정보통신의 발달로 초고속통신망을 설치한 사이버아파트가 급속히
확산되고 있다.

기능적인 면에서도 주택이 단순한 거주공간에서 벗어나 생활과 업무를
동시에 해결할 수 있는 복합공간으로 변모하고 있다.

< 송진흡 기자 jinhup@ked.co.kr >


( 한 국 경 제 신 문 1999년 12월 20일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