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계민 < 본사 논설위원 >

불과 2년전까지만 해도 미국경제의 최대과제는 쌍둥이 적자였다.

막대한 재정적자와 무역적자의 지속이 그것이다.

물론 지금은 상황이 완전히 바뀌어 오히려 재정흑자를 어떻게 처리하느냐를
놓고 민주.공화 양당이 팽팽한 공방전을 벌이는 행복한 고민에 쌓여있다.

논란의 초점은 앞으로 10년간 예상되는 약 1조달러 규모의 재정흑자를
어디다 쓰느냐는 것이다.

의회 다수당인 공화당은 더 걷힐 세금을 아예 납세자에게 돌려주는 감세를
단행해야 한다는 주장이고, 클린턴 대통령이 속해 있는 민주당은 그 재원으로
복지지출을 늘려야 한다는 입장이다.

결국 공화당의 감세안 의결에 클린턴 대통령이 입법거부권 행사로 맞서
논란은 원점으로 되돌려졌지만 경제학자들의 생각은 이들과는 또 다르다.

추정치에 불과한 재정흑자를 놓고 의회에서 감세논쟁을 벌이는 것은 무익한
정치놀음의 전형이라고 꼬집으면서 남아도는 세수를 우선 공공부채를 갚는데
써야 한다고 역설한다.

재정이 지난해부터 흑자로 전환됐다고는 하지만 미국의 공공부채는 여전히
엄청난 규모에 달하고 있기 때문이라는 설명이다.

사실 재정운영을 어떻게 하느냐의 문제는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어느 나라나
안고 있는 숙제다.

그것도 재정적자, 또는 누적된 국가채무를 어떻게 관리하느냐가 대부분이다.

비록 미국이 재정흑자 처리를 둘러싸고 논란을 벌이고 있다고는 하지만
기본적으로 쌓인 국가채무의 관리를 어떻게 할 것인가에 대한 숙제에서
벗어난 것은 아니다.

미국의 국가채무는 95년 현재 약 3조6천억달러에 달한다.

지난 80년 7천1백억달러에 불과했던 것이 15년만에 5배가까이 불어났다.

이를 인구수로 나눈 1인당 국가채무액을 따져보면 약 1만4천달러, 우리
돈으로 1천6백여만원에 이른다.

국가경제의 부채감당 능력을 가늠해 보는 국내총생산(GDP) 대비 정부부채
비율은 63%로 일본의 82.6%나 OECD 평균인 71.1%에 비해서는 낮지만 비교적
높은 편에 속한다.

며칠전 기획예산처가 발표한 우리나라의 국가채무 현황을 보면 금년말까지
1백11조5천억원에 이를 것으로 추산됐다.

GDP대비 비율은 23.1%.

국민 1인당 국가채무 규모는 2백36만원인 셈이다.

그러나 정부가 지급보증한 채무액이 94조4천억원으로, 이것까지 합해 보면
사실상의 국가빚은 2백조원을 넘는다는 계산이 나온다.

이같은 정부채무 규모는 통계상으로만 보면 매우 건전한 상태에 있고,
경제규모에 비해 보더라도 이 정도의 적자는 충분히 감당할 수 있다는
해석이 가능하다.

실제로 그동안의 우리나라 재정은 어느나라에 못지않게 건전하게 운영돼
왔고 그만큼 적자문제는 심각하지 않았던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선진국들과의 평면적 수치비교만으로 적자재정을 확대할 여력이
있다고 보는 것은 잘못이다.

우선 재정기조의 장기적 변화와 거시경제 상황, 특히 금융시장의 역할과
기능 등을 동시에 검토해보고 적정여부를 가려봐야 하기 때문에 신중한
판단이 필요하다.

또 부채의 수준보다 증가율이나 그 내용이 더 중요하다는 점에서 더욱
그렇다.

우리의 국가채무는 외환위기 이후 불과 2년만에 70%가 늘어났다.

더구나 앞으로 더욱 급속히 늘어날 여지가 많다는 점은 아무도 부인하지
않는다.

일단 적자가 발생하면 매년 누적적으로 불어나는 것이 재정의 일반적인
속성이다.

적자를 메우기 위해 또 빚을 내야하는 악순환이 일어나기 때문이다.

또 우리의 현실은 정상적인 재정운영을 한다 하더라도 경제가 발전하고
인구구조가 노령화되면서 복지지출에 대한 수요가 급격히 늘어날 수밖에
없다.

아직도 열악한 사회간접자본의 확충 수요는 여전하고, 길게는 통일비용도
정부가 풀어야 할 과제다.

반면 세입을 늘리는 것은 쉽지가 않다.

세율인상은 경제보다 정치 사회적 파장이 더 큰 변수로 작용하기 때문이다.

역대 정부가 중장기 재정계획을 세울 때마다 조세부담률을 대폭 높이겠다고
발표했지만 한번도 당초목표에 근접해 본 적이 없는 것도 그 때문이다.

따라서 정부의 정책의지가 그야말로 단호하지 않으면 달성하기 어려운 것이
적자재정의 탈피다.

그런 점에서 지난 69년부터 97년까지 거의 30년 가까이 적자를 보여온 미국
재정이 흑자기조로 되돌아섰다는 것은 엄청난 변화다.

그러나 그 이면에는 엄청난 고통이 뒤따랐음도 인식해야 할 필요가 있다.

쌓여가는 나라 빚을 보면서 걱정이 앞서지 않는 국민은 없을 것이다.

다음 세대에 빚더미 국가를 물려주지 않기 위해서는 정부의 장기적인 비전과
확고한 시정의지가 무엇보다 중요하다.

곧 본격화될 국회의 내년도 예산심의도 그같은 관점에서 국민들이 다소나마
마음을 놓을 수 있도록 철저하게 이뤄지기를 기대한다.

( 한 국 경 제 신 문 1999년 10월 1일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