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94년 미국 뉴욕 월스트리트의 이름난 투자회사 디이샤우(D.E.Shaw&CO.)
의 수석부사장실.

한 젊은이가 메모지에 뭔가를 써 내려가고 있었다.

2년전 스물여덟살의 나이로 이 회사 수석부사장 자리에 오른 제프리 베조스
였다.

전자상거래 시장이 1년동안 2천4백%나 성장했다는 뉴스를 접한 그는 인터넷
을 통해 판매할만한 상품 목록을 생각하고 있는 중이었다.

"레코드" "CD롬타이틀" "꽃" "컴퓨터 소프트웨어" "책".

"책이라..."

갑자기 머릿속이 번쩍하면서 메모지에 상품명을 적던 그의 손이 멈췄다.

30분 뒤 그는 사표를 던지고 연봉 1백만달러짜리 직장을 떠났다.

그 길로 집으로 간 그는 아내와 함께 이삿짐을 싸 마이크로소프트사가
자리잡은 미국 서부의 시애틀을 향해 차를 몰았다.

얼마나 마음이 급했던지 이삿짐을 실은 트럭운전사에게 정확히 어디에 짐을
내려야 할지도 지시하지 않은 채였다.

아내가 시애틀까지 렌터카를 모는동안 그는 뒷좌석에서 노트북으로 사업
계획서를 짰다.

그들 부부가 차를 멈춘 곳은 시애틀이었다.

시애틀 교외에 집을 빌린 그는 그 집 창고에서 커대브러.컴(Cadabra.com)
이란 기업을 차렸다.

프로그래머 4명과 함께 중고 가구를 고쳐 만든 책상에서 밤낮으로 개발에
매달렸다.

한편으론 디이샤우 시절 사귄 사람들에게 전화를 걸어 사업자금을 보태
달라고 호소했다.

그의 능력을 믿었던 지인들은 선뜻 2백만달러를 모아줬다.

뉴욕에서 보낸 이삿짐이 도착한 것은 회사의 골격이 그럭저럭 세워진
뒤였다.

그리고 석달쯤 후 그는 인터넷을 통해 책을 파는 기업을 출범시켰다.

출범직후 이 회사는 아마존 닷 컴(amazon.com)으로 간판을 바꿔 달았다.

인터넷 서점이란 영역을 개척한 아마존의 화려하지 않은 출발이었다.

4년이 지난 지금 아마존은 시장가치 2백24억달러(9월10일 기준)에 달하는
세계 최대 인터넷 서점이 됐다.

이 회사 최대주주인 베조스는 재산이 57억달러(포천지 최근호 기준)를
돌파하며 손꼽히는 억만장자로 등극했다.

베조스는 지난 86년 미국 프린스턴대학을 졸업한 직후 피텔이란 작은
컴퓨터 회사를 세웠다.

그러나 영업이 신통찮아 2년 만에 집어치웠다.

대신 뱅커스 트러스트에 입사해 2천5백억달러에 이르는 자산을 효율적으로
운영할 수 있도록 지원하는 컴퓨터 프로그램 개발을 맡았다.

탁월한 능력을 인정받은 그는 지난 90년 2월 스물여섯살 때 이 회사 최연소
부사장 자리에 올랐다.

이어 곧바로 투자회사 디이샤우의 펀드매니저로 변신했다.

이곳에서도 혁혁한 성과를 거둬 스물여덟살에 최연소 수석부사장이 됐다.

베조스는 독특한 경영철학으로도 화제가 되고 있다.

시애틀시 2번가 콜롬비아 빌딩에 있는 아마존 본사에 근무하는 직원들은
헌가구와 각목으로 만든 책상을 쓰고 있다.

베조스는 창업직후 첫 직원을 채용한 뒤 가장 먼저 한 일이 창고에서 헌
문짝과 각목으로 책상을 만들어 준 것이었다.

아마존 직원들은 지금도 그 때와 같은 형태의 책상을 쓰고 있다.

물론 지금은 베조스가 직접 만들지 않고 목공소에 주문하고 있다는 점은
다르지만.

그는 "이 책상은 근검절약의 상징으로 아마존이 고객을 위해서만 돈을
지출한다는 사실을 확실히 하기 위한 것"이라고 말한다.

아마존 사무실 바닥의 카펫은 지저분하기 그지 없다.

벽도 얼룩이 덕지덕지 묻어있다.

입주한 이래 한번도 단장을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한 푼이라도 아끼려는 베조스의 구두쇠 전략은 자기자신에게도 예외가
아니다.

수십억달러의 자산가이지만 직원들과 같은 책상을 쓴다.

차는 서민들이 타는 혼다 어코드를 몬다.

사는 곳도 시애틀 시내의 월세 아파트다.

베조스는 석달에 한번씩 시애틀 지역에서 근무하는 전 직원들을 소집해
회의를 연다.

그는 이 자리에서 "월스트리트는 잊어버려라"고 다그친다.

스톡옵션으로 백만장자가 된 직원들이 주가 움직임에 신경을 쓰는 것에
대해 질책하는 것이다.

그는 "우리중 누구도 당장 내일의 주가를 마음대로 할 수 없지만 앞으로
5년 뒤의 주가에는 영향을 미칠 수 있다"며 "5년 뒤를 위해 어떻게 해야
할지에 대해 생각하라"고 닥달한다.

그는 직원들에게 매우 빡빡한 근무자세를 강요한다.

아마존에서 연장근무는 일상사다.

지저분해 보이는 근무환경에 복장에 대한 간섭도 별로 없어 언뜻 보면
느슨해 보이지만 생산성을 높이기 위한 유무형의 압력은 미국 어느 회사보다
강한 편이다.

그는 보안에 대한 집착이 강하다.

직원들에겐 기자들의 사소한 질문에도 절대로 대답하면 안된다는 지침을
내려 놓고 있다.

판매량이나 베스트셀러 순위같은 "1급 정보"는 말할 것도 없고 현재 직원수
조차 밝히는 것을 금지하고 있다.

조금이라도 라이벌에게 도움이 될 수 있는 정보가 새 나가는 것을 철저히
차단하겠다는 것이다.

세계 금융의 중심지 월스트리트에서도 장래가 촉망되던 금융 전문가로
하여금 사표를 내던지고 새로운 일에 뛰어들도록 만든 힘은 무엇일까.

"80세 가량이 돼 인생을 되돌아 볼 때 20대에 월스트리트를 떠나지 않은
것은 후회하지 않을지 몰라도 큰 기회를 놓친 것은 후회할 것 같아서"라는
것이 이에 대한 그의 답변이다.

< 김용준 기자 dialect@ >

( 한 국 경 제 신 문 1999년 9월 14일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