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병호 < 자유기업센터 소장 >

대개 인간의 삶의 자취는 죽음과 함께 흩어진다.

그러나 세월이 갈수록 고인을 기리는 사람이 늘어나는 경우가 있다.

시대를 앞서 살았던 "자유의 철학자"이자 위대한 경제학자였던 프리드리히
아우구스트 폰 하이에크(Friedrich von Hayek)가 이 경우에 해당한다.

지난 5월8일은 그가 태어난 지 100주년 되는 날이었다.

세계적인 권위지인 영국의"이코노미스트(The Economist)"는 그를 "금세기
경제적 자유주의의 가장 위대한 대변자"라고 불렀다.

영국병을 치유하는 데 성공한 마가렛 대처총리는 하이에크의 90세 생일에
"당신의 작업과 사상이 우리에게 준 지도력과 영감은 결정적이었으며,
우리는 당신에게 큰 빚을 지고 있습니다"라는 내용의 편지를 보냈다.

1980년대 미국의 변화를 주도했던 로널드 레이건 대통령은 미국의 자유를
수호하는 데 있어서 하이에크의 사상적 기여를 치하하는 뜻에서 91년에
자유메달(Presidential Medal of Freedom)을 주기도 했다.

이 상은 미국정부가 민간인에게 수여하는 최고의 영예로운 상이다.

실로 하이에크는 전세계의 지적.정치적 생활을 혁명적으로 바꿔놓았다.

40년대 대다수 지식인들이 계획과 통제,그리고 정부개입이라는 좌파
이데올로기에 경도돼 있던 시절에 하이에크는 개인의 자유와 시장질서를
회복시키는 것만이 인류를 구원하는 유일한 길임을 설파했다.

그러나 그의 사상은 오랫동안 제대로 대접을 받지 못했다.

그의 나이 75세가 되던 74년에야 비로소 노벨경제학상을 탔다.

최근 하이에크 탄생 100주년 기념앨범집을 낸 영국 아담스미스 연구소의
이몬 버틀러 소장은 이 책 서문에서 다음과 같이 썼다.

"하이에크의 유산 중 가장 영속적인 것은, 아마도 의식적인 계획없이 사회가
어떻게 번영할 수 있는가에 관한 그의 주장일 것이다.

실제로 사회는 계획이 없을 때 더 번성한다.

사회는 자생적인 질서(Spontaneous Order)인데, 그것은 인간들의 행동을
통하여 형성되지만 인간이 고안해 낸 산물은 아니다.

언어와 마찬가지로, 사회는 지배자 없이도 성장하고 발전한다.

가격 매커니즘은 수많은 개인들의 수많은 행동을 조정한다.

가격은 상승함으로써 공급보다 수요가 많다는 메시지를 보내고, 그 수요를
충족시키는 방향으로 노력할 것을 각개인에 촉구한다.

마치 마술처럼, 변화하라고 말할 필요도 없이 이루어진다.

이런 시장교환체계는 광대하고 복잡미묘하다.

인위적으로 그 체계를 조작하거나 더 합리적인 대안으로 바꾸려 할 때 조정
자체가 붕괴하기도 한다.

우리의 이성만으로는 그 과제를 수행할 수 없다.

따라서 정부는 선험적인 질서를 사회에 부과하려고 해서는 안되며, 오히려
시장의 자유로운 작동을 방해하는 장애물들을 제거하고 자생적 시장질서가
작동할 수 있도록 정의의 규범들을 발견하려는 데 노력해야 한다"

하이에크의 위대함은 계획하지 않은 질서, 즉 자생적 질서를 역설한 데
있다.

이성의 힘을 이용해서 사회를 계획할 수 있다는 사고가 일반적이었던 시절에
하이에크는 사회질서가 인간의 계획에 의해 형성되지도 않았고 될 수도 없다
고 말했다.

그리고 합리적 계획에 의해 사회질서를 구성하려는 시도, 특히 사회주의의
시도는 필연적으로 폭정으로 변질돼 실패할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하이에크의 핵심사상인 자생적 질서의 내용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하이에크는 인간의 본성이 어떠한가에 대한 질문으로부터 자신의
철학을 시작했다.

그는 인간이 "구조적으로 무지하다"는 사실을 인간의 본성으로 생각한다.

둘째, 구조적으로 무지한 인간은 행동규칙이 있기 때문에 삶을 꾸려나갈
수 있다.

행동규칙들은 인간의 구조적인 무지를 보완해 주는 수단으로서 주로 무엇을
"하지 말라"는 형식을 갖고 있다.

이런 행동규칙에는 도덕규칙, 전통 및 법규칙 등이 있다.

예를 들면 "도둑질하지 말라"는 것과 같은 규칙이다.

셋째, 인간이 이러한 행동규칙들을 지켜가면서 사회질서가 생겨나는데,
하이에크는 이것을 자생적 질서라고 불렀다.

이런 질서는 외부간섭 없이도 스스로 조정되는 질서다.

대표적인 것이 시장경제다.

시장에서 경제문제에 대한 이론적 지식을 갖지 못한 사람들이 훌륭하게
교환행위를 한다.

정부의 계획덕에 가능한게 아니다.

교환당사자가 일정한 행동규칙들을 지키는 가운데 시장이라는 자생적
질서가 형성되는 것이다.

넷째, 자생적 질서에 대비되는 것이 인위적 질서다.

조직질서가 대표적이다.

인위적 질서 속에서 인간의 행동규칙은 주로 무엇을 "하라"는 형식을 띠고
있다.

그 이유는 조직의 목표, 즉 집단적인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서다.

다섯째, 시장경제와 같은 자생적 질서를 인위적 질서로 대체하면 치명적인
결과를 낳을 뿐이라고 하이에크는 말한다.

시장경제는 개개인이 갖고 있는 지식을 최대한 활용할 뿐만 아니라 개개인의
오류를 정확하게 가려내서 통제하는 기능을 가지고 있는데, 그것을 인위적
질서로 대체하게 되면 이런 시장기능이 정지되는 탓이다.

시장기능을 대신하는 관료들은 오류투성이의 지식을 갖고 인간행동을 통제할
뿐만 아니라 지극히 차별적이고 자의적으로 이런 통제를 수행하게 되므로
치명적인 결과를 가져오게 된다.

사회주의 계획경제가 실패할 수밖에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뿐만 아니라 시장에 부분적으로 개입하는 간섭주의 정부 또한 중대한
부작용을 초래한다.

이런 하이에크의 사상은 오늘날 많은 나라에서 광범위하게 실시되고 있는
민영화, 규제개혁, 작은 정부, 연금개혁, 노동시장의 유연화등 다양한 정책
들의 이론적.철학적 토대가 되고 있다.

그래서 흔히 사람들은 그를 신자유주의의 선구자라고 부르기도 한다.

그의 사상은 그동안 한국에서는 거의 알려지지 않았다.

명분론과 좌파 이데올로기의 영향력이 강한 한국사회에서 그의 사상이
제대로 소개되기란 무척 어려웠다.

그러나 그의 사상은 한국경제를 설명하고 규명하는데 뚜렷한 좌표를
던져주기에 충분하다.

( 한 국 경 제 신 문 1999년 5월 17일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