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90년초 현대자동차는 미국 텍사스주에서 PL(제조물책임) 소송에
휘말렸다.

고속도로를 달리던 "엑셀"이 구르면서 조수석에 탔던 여인이 반신불수가
됐다.

그녀는 엑셀의 안전벨트와 루프(roof:차지붕)에 문제가 있다며 3천만달러
손해배상을 청구했다.

소송에서 질 경우 현대자동차가 입을 손해는 막대했다.

3천만달러는 물론 시장에 깔아 놓은 엑셀의 안전벨트, 루프 등을 다 갈아
줘야 할 판이었다.

당시 이런 종류의 소송에선 대부분 제조업체가 패소해 승산도 없었다.

재판은 4년을 끌었다.

그러나 94년 4월 배심원 12명 전원은 현대의 손을 들어줬다.

하종선 변호사(44.회명합동법률사무소)는 당시 현대자동차 고문변호사로
활약하며 이 소송을 승리로 이끈 주인공이다.

그는 이 여성이 안전벨트를 매지 않았다는 사실을 밝혀냈다.

또 실험을 통해 엑셀의 루프가 혼다 등 일류자동차에 비해 더 찌그러들지
않는다는 점도 입증했다.

이것 뿐만 아니다.

하 변호사는 현대자동차에서 근무하는 10여년 동안 수백건에 달하는 PL
소송을 다뤘다.

재판까지 간 경우는 적었지만 승률은 90%를 넘었다.

"PL 소송은 대부분 사고가 난 다음에 진행되는 만큼 과학적으로 접근해야
합니다. 합리적인 논리를 갖고 객관적인 증거로 승부해야 하지요. 추리도
필요하고 때론 상상력도 동원돼야 합니다"

하 변호사는 그래서 문과(서울대 법대) 출신이지만 "직업상" 이과 계통에
관심이 많은 편이다.

전혀 다뤄보지 않았던 분야의 사건을 맡게되면 최소 1주일간은 관련 분야
전문서적에 파묻혀 산다.

인터넷을 뒤지느라 꼬박 밤을 샐 때도 적지 않다.

"사고를 정확히 재현할 수 있어야 뭐가 문제인지 알 수 있습니다. 설계
전문가 사고재현기술자 인체생태전문의 등 전문가 집단이 참여해 대규모
팀을 이룹니다. 이들이 도와주는 셈이지만 이들에게 어떤 부탁을 해야할지,
분석결과를 어떻게 종합할지는 결국 변호사의 몫이지요"

하 변호사는 요즘은 지난 94년 공군참모총장(고 조근해 대장) 등이 탔다가
추락한 "UH60" 헬기의 결함을 밝혀내는 소송을 맡고 있다.

BMW 등 차량의 급발진사고 관련 소송도 진행하고 있다.

외국업체를 상대로 한 PL소송은 거의 대부분 그가 맡고 있다고 보면 된다.

국내에 아직 PL법이 제정되지 않은 탓도 있다.

그러나 그보단 15년 가까이 PL법이 제일 강화돼 있다는 미국 제조업체와
소비자들을 상대로 일을 진행해온 그의 경력을 알고 찾아오는 이가 많아서다.

하 변호사는 경기고, 서울대 법대라는 학력이 말해주듯 순수한 "토종"이다.

그러나 판.검사쪽엔 관심이 적었다.

기업변호사, 그것도 국제문제를 다루는 분야에 일찍부터 눈을 돌렸다.

79년 사법고시에 합격하고 81년 사법연수원을 수료한 뒤 곧바로 미국으로
날라갔다.

미국 변호사 시험을 보기 위해서 이기도 했지만 "국제 경험"을 쌓기
위해서였다.

로스앤젤레스에서 선배인 곽철 변호사 등 5,6명과 함께 4년간 일했다.

은행과 상사 등 현지 진출 국내 기업들이 주고객이었다.

교환변호사로서 대형회계법인에 들어가는 관행과 달리 직접 소송을 진행
하는 현장 변호사로 뛰었다.

"대형회계법인에 가서 앉아 있어서는 구경하는 것 밖에 는 없다고 생각
했지요. 직접 미국 법정에 서서 정면 승부를 하고 싶었지요. 이때 쌓은
스트리트파이터(거리의 싸움꾼:street fighter)로서의 경험이 큰 도움이
됐습니다"

하 변호사는 86년 현대자동차에 상임법률고문(이사대우)으로 입사해 본격적
인 기업변호사 생활을 시작했다.

대미 수출이 많은데다 대표적 소비자상품이었던 만큼 자연히 PL관련 소송을
많이 다뤘다.

10년간 일해 충분히 "봉사"했다고 생각한 그는 95년 상무대우로 퇴사했다.

곧바로 대기업 고문 변호사로 활동하던 동료들과 함께 회명합동벌률사무소를
만들었다.

안방문이 열려 다국적 기업이 국내에서 활동하게 되고 소비자 의식이
높아지면 PL분야 소송이 급증할 것으로 예상하고 결심한 일이었다.

그는 PL 소송이 기업에는 부담요인이 되겠지만 적극적으로 PL을 활용하는
자세가 필요하다는 것이 그의 지론.

"우리 제품은 중.저가 제품이기 때문에 안전을 고려할 수 없었다는 식은
통하지 않는 핑계에 불과합니다. 오히려 안전도 높은 제품을 만들어 이를
경쟁력의 원천으로 활용해야 합니다"

하 변호사는 그래서 우리나라에서도 제품 설계, 조립, 판매 과정 전반에
걸쳐 발생할 수 있는 안전문제를 미리 분석해 물건을 만드는 "안전 감사"제
를 정착시켜야 한다고 강조했다.

< 권영설 기자 yskwon@ >


[ 특별취재팀 = 최필규 산업1부장(팀장)/
김정호 채자영 강현철 이익원 권영설 이심기(산업1부)
노혜령(산업2부) 김문권(사회1부) 육동인(사회2부)
윤성민(유통부) 김태철(증권부) 류성(정보통신부) 기자 ]

( 한 국 경 제 신 문 1999년 5월 11일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