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기관의 계좌추적권 남용이 금융거래의 비밀보장을 위협하고 있다는
우려가 갈수록 커지고 있다. 지난해 계좌추적 요청건수가 모두 9만8천9백
25건으로 97년보다 46%나 늘었으며, 이중에서도 정식으로 법원의 영장을
받은 경우는 전체의 14%에 불과했고 나머지는 계좌추적권을 가진 정부기관
들이 요청했다는 보도로만 봐도 이같은 우려가 전혀 근거없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알 수 있다.

이렇게 되면 금융실명제 아래에서 마땅히 보호받아야 할 불특정 다수의
금융거래 비밀, 더 나아가 사생활까지 심각하게 위협받기 때문에 정상적인
금융거래마저 위축시킬 가능성이 크다. 특히 오늘날처럼 정보유통이 신속
하고 광범위하게 이뤄지는 정보화시대에는 개인정보가 잘못 유출되면 얼마나
엄청난 선의의 피해자를 만들지 모를 일이다. 이밖에 많게는 한번에 수백명
에서 수천명의 계좌추적을 요청하고 추적결과를 독촉함에 따라 일선 금융
기관의 업무부담이 크게 늘어나는 부작용도 무시할 수 없다.

원칙적으로 계좌추적권은 불법행위에 대한 수사상의 목적으로 불가피한
경우에 한해 법원의 영장을 받아 사용해야 한다. 하지만 실제로는 국세청
금융감독기관 공직자윤리위원회 중앙선거관리위원회 등 여러 정부기관들이
각각 개별법에 근거해 함부로 계좌추적권을 행사하는 것이 우리 현실이다.
게다가 최근에는 공정거래위원회도 대기업그룹의 부당내부거래를 단속하고
구조조정을 촉진한다는 명분으로 2년동안 한시적이라는 단서아래 계좌추적권
을 받아내 계좌추적권이 남용될 가능성이 한층 높아졌다.

이같은 상황에서 지난해 11월말 서울지방법원 영장담당 법관들이 간담회를
갖고 수사편의주의에 따른 인권침해 가능성을 줄이기 위해 앞으로는 긴박한
수사상의 필요없이는 계좌추적을 위한 압수수색영장 신청을 모두 기각하기로
내부방침을 정한 것은 그나마 다행한 일이다. 특히 "특정계좌와 연결된 모든
계좌" 또는 "특정 금융기관내의 특정계좌와 연결된 모든 계좌"와 같이 포괄
적인 계좌추적을 요구하는 경우에는 원칙적으로 영장청구를 기각하기로 한
것은 당연한 일이라고 본다.

더 나아가 영장청구 없이 계좌추적권을 행사할 수 있는 정부기관들이
권한을 남용하지 못하도록 계좌추적권 행사 요건을 명시적으로 엄격하게
규정할 필요가 있다. 최근 미국에서도 불법적인 돈세탁 방지를 위해 은행
들이 고객의 금융거래 내용을 감시하고 의심나는 경우에는 감독기관에
의무적으로 보고하도록 하는 규정을 도입하려다 사생활 침해우려 때문에
반대가 많아 백지화했다고 한다.

물론 정부기관이나 수사기관에서는 업무상 불편이 적지 않다고 불만이
많을 것이다. 하지만 목적이 좋다고 수단을 합리화해주는 것이 아니듯이
당면과제인 거래의 투명성을 확보하기 위해서도 비밀보장이 전제조건이라는
점을 명심해야 할 것이다.

( 한 국 경 제 신 문 1999년 3월 26일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