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강숙 < 한국예술종합학교 총장 >

설은 힘이다.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 민족을 움직이는 힘이다.

물리적 힘은 아니다.

물리적인 힘으로는 그 힘이 아무리 크다고 해도 수십만대의 차량으로
고속도로를 주차장으로 만들 수 없다.

설은 민족의 가슴 깊은 곳에 숨겨둔 정신적 힘이다.

민족의 저력은 바로 이 힘에 있다.

신정이 좋아요?

구정이 좋아요?

누가 묻는다.

진짜 설을 구정으로 생각하는 사람이 나는 좋다.

설이 되면 무슨 생각이 나요?

고향 생각이 납니다.

흩어져 있던 식구들이 다 모이는 날이기도 하지요.

식구들이 모이는 날이 왜 좋나요?

어떤 중년 남자가 다음과 같이 대답한다.

좋을 수밖에 없잖아요.

떨어져 있던 형제들이 한자리에 모여서 그동안 살아온 이야기도 하고
못나눈 정도 나눈다는 것, 얼마나 좋습니까.

부모님께 세배도 올리고, 선조들에게 제사도 드리고 말입니다.

생각하면 할수록 좋은 일이지요.

설에 고향에 가면 "다 모여 있지요. 모두 만날 수 있지요".

오랫동안 못보던 친구들도 볼수 있고...

대답은 계속된다.

요즘에는 어떤지 모르지만, 옛날에는 설까지 기다리라는 엄마의 말을 듣고
설에 새 옷도 한벌 받을 수 있었고, 운동화도 한켤레 받을 수 있었지요.

생각하면 정말 아름다운 추억이 아닐 수 없어요.

고기도 보통때 보다 더 많이 먹을 수 있었고 말입니다.

반드시 새 옷, 새 신 때문만은 아닐 것입니다.

1년에 한번 찾아오는 눈오는 설날은 아름다운 동화의 세계 바로 그것이
아니겠습니까.

동화의 세계를 그리는 마음은 인간의 삶에 중요한 것이 되지요.

서울에서 현실적 생활에 찌들려 살다 보면, 그리고 그러한 삶이 삶의 전부
라고 생각하면서 살다 보면, 설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 수 없게 되지요.

서울서 살든, 시골서 살든간에 우리 모두의 마음속에 설이 살아 있으면
마음이 삭막하게 되지 않지요.

한마디로 설은 우리의 정신을 살찌게 하는 양식이라고 생각합니다.

나는 위와 같이 대답하는 사람이 좋다.

그리고 다시 말하는 것이지만 누가 시키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우리 민족
구성원의 대부분이 설날이 되면 고속도로를 주차장으로 만들기 때문에
"우리에겐 희망이 있다"라고 말하고 싶다.

순수한 우리 말을 오랜 세월동안 지키고 있을 뿐만 아니라 수천년동안
우리 땅을 지키며 살아온 끈질긴 우리의 힘이 나는 자랑스럽다.

이 힘은 옛날이나 오늘날이나 우리의 가슴 한 곳에 숨어있고 지금 이
순간에도 우리를 지탱시키고 있다.

그래서 설을 맞이하는 나의 가슴은 또 한번 다시 설레인다.

설은 서울보다 고향과 상관되는 개념인 것 같다.

서울은 현실적 삶의 찌들림, 고향은 찌들림으로부터의 일탈, 이런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도시인이든, 시골인이든 간에 인간의 마음은 가끔씩 현실로부터의 일탈을
필요로 하는 것 같다.

인간성과 비인간성의 개념을 언급할 때가 있는데, 일탈이야 말로 인간성을
회복시키는 묘약이 아닌가 싶다.

이 말은 "우리 모두 시골 사람이 되자"라는 주장이 가능하다는 이야기다.

21세기를 대비해야 하는 지금에 와서 국제경쟁력에 뒤지는 시골뜨기가
되자는 의미에서 하는 이야기는 절대로 아니다.

경쟁의 세계에서 살아남기 위해 매일 같이 정신없이 자기 일에 매몰되는
것이 중요하지 않다는 말을 하자는 것도 물론 아니다.

우리 민족을 지금까지, 그리고 앞으로도 "하나"로 묶어 줄 힘줄인 설
정신을 잊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도시인의 가슴이 반드시 메말랐다고 말할 수는 없다.

시골인의 가슴이 반드시 풍성하다고 말할 수도 없다.

다만 도시와 시골이 조화를 이루어야 한다는 것은 누구도 부인할 수 없다는
사실을 지적해두고 싶다.

도시와 시골의 조화는 경제분야에서만 이루어져서는 되지 않는다.

문화분야에서도 이루어져야 한다.

그렇게 하려면 우리는 설의 중요성을 다시 한번 더 심각하게 생각해야 한다.

이번 설을 통해 우리는 다시 한번 더 우리의 과거를 회상하고 말로만이
아닌 반성을 해야 하고, 그리고 참으로 새로운 각오를 해야 한다.

설 연휴의 휴식을 통해서 새충전을 하고 우리 모두 재충전한 덕분으로
나라도 재충전되어 세계 열강들과 맞겨룰 힘이 비축되어야 하지 않을까 싶다.

( 한 국 경 제 신 문 1999년 2월 13일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