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기택 < 중앙대 교수.경제학 hongecon@cau.ac.kr >

영국의 파이낸셜 타임스는 1998년의 인물로 앨런 그린스펀 미 FRB(연방준비
제도이사회)의장을 선정했다.

작년 한해동안 아시아 금융위기, 러시아경제 붕괴 등에서 유발된 불안요소가
미국 금융시장에 유입되는 것을 차단해 미국경제, 나아가 세계경제의 안정화
에 기여한 점을 높이 평가한 것이다.

그린스펀 의장은 금융경색 조짐을 보이던 채권시장과 과열양상을 보이던
주식시장의 상반된 시장신호에 고심하면서 작년 하반기에 0.25% 포인트씩
세 차례에 걸쳐 매우 조심스럽게 금리인하를 단행했다.

미국행정부가 FRB의 정책에 부당한 압력을 행사하는 것이 아니냐는 기자들의
질문에 전 백안관 대변인인 마이클 맥커리는 다음과 같이 답한 적이 있다.

백악관은 그린스펀 의장이 금융정책에 관해 발표할 때까지 그 내용을 알 수
없을 뿐 아니라 발표 후에도 무슨 내용인지 이해를 못한다고 하여 폭소를
자아냈다.

앞의 말은 중앙은행의 독립성은 확고하다는 뜻이고 뒤의 말은 금융정책
최고책임자는 의도적으로 말을 흐린다는 뜻이다.

금융정책 최고책임자의 말 한마디가 금융시장에 엄청난 영향을 미치기
때문에 시장이 알아서 판단할 수 있는 여지를 남겨 놓는다는 뜻이다.

명확한 의견제시는 혹시라도 잘못되어 시장을 왜곡시킬까 우려하기
때문이다.

그러면 우리는 어떠한가.

지난달 언론 보도에서는 정부 고위 경제정책 담당자의 말을 인용해 올해에는
금리를 5%까지 인하하겠다, 통화공급을 대폭 늘리겠다, 외환위기는 사라졌다,
경제는 이미 본격적인 회복 단계에 들어섰다는 등 경제 낙관론을 쏟아부었다.

그 이후 주식시장은 폭등세로 들어섰고 금리는 하락하고 소비 역시 증가하는
조짐이 보인다.

시장이 다시 살아나고 있다는 점에서 정책담당자의 의도는 성공한 셈이다.

그러나 문제는 우리 경제의 시장 실물 펀드멘탈이 정말로 변화했느냐이다.

정부의 낙관론만큼 시장 펀드멘탈이 호전되지 않았다면 주식시장은 다시
하락할 것이고 뒤늦게 추격매수에 나선 개인 투자자들은 엄청난 손해를 입을
것이다.

민간 소비 역시 다시 감소하여 결국 시장의 일시적 거품 형성으로 경제회복
만 늦어질까 우려된다.

그렇지 않기를 바라지만 아무튼 우리 경제정책담당자들은 용감하다고 할 수
밖에 없다.

정부에서 강력하게 추진하고 있는 재벌그룹간의 빅딜 역시 시장원리에 합당
한가를 생각해보아야 한다.

치열한 국제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우리 대기업과 같이 재무구조가
취약한 기업들은 흡수 합병을 통해 살길을 찾을 수 밖에 없다.

그러나 인수 합병문제는 기본적으로 이해 당사자인 기업과 채권자간에 결정
되어야 할 문제이다.

채권자들은 어떻게 하는 것이 채권확보에 가장 유리한가를 제일 중요한
기준으로 삼아야 한다.

그러므로 채권자 입장에서는 부실정도가 심한 그룹일수록 더 많은 기업매각
을 추진하도록 하여 부채비율을 낮추도록 해야한다.

시장상황의 변화도 감안해야 한다.

시장여건이 호전된 산업은 그렇지 않은 산업보다는 빅딜의 필요성이 그 만큼
줄어든다.

현재 정부 주도아래 진행되고 있는 빅딜은 이러한 원칙이 지켜지지 않는
부분이 많다.

빅딜의 형평성과 효율성에 의문을 제기하는 지적도 강하게 흘러나오고 있다.

정부의 직접적 간여는 국제적으로는 공정경쟁을 저해하는 한국주식회사의
설립이라는 오해를 사서 통상마찰을 야기할 우려가 있다.

정부는 금융기관의 건전성, 기업의 자기자본비율, 상호지급보증 금지, 부당
내부거래 차단, 회계정보의 투명성 등 시장 기구가 원활히 작동할 수 있는
인프라를 구축하는데 끝내야 한다.

이러한 인프라를 구축하여 철저하게 운영한다면 정부가 직접 개입하지
않더라도 원하는 결과를 얻을 수 있다.

지금과 같은 비상 경제 상황에서는 정부의 직접적인 개입이 불가피 하다고
항변할 수도 있다.

그러나 현재의 상황이 초래된 것도 정부의 과다한 시장개입이 주원인이라는
지적이 많다.

비상상황일수록 시장에 반하는 행위는 위험스럽다.

국민의 정부의 경제철학인 시장경제와 민주주의 병행 발전은 시장기능과
힘을 존중하는데서 출발해야 한다.

( 한 국 경 제 신 문 1999년 1월 11일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