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기업 과장이던 이모(37)씨는 지난 3월 회사의 구조조정으로 하루 아침에
실업자로 전락했다.

이후 이씨가 쓴 이력서만 30장이 넘는다.

갈 때까지 간 기분으로 최근 문을 두드린 곳이 공공취업알선기관인 서울
봉천동 인력은행.

상담원은 다행히 한 중소기업에서 경력자를 뽑겠다는 연락이 왔다고
알려주었다.

조건은 본봉과 보너스를 합쳐 연 2천만원.

이전 직장의 연봉 3천6백만원에 비해 절반 수준이다.

물론 전에 있던 대기업에서 받던 주택융자금, 콘도이용권제공, 체력단련비
같은 복지혜택은 한 푼도 없다.

그나마도 빨리 결정하지 않으면 다른 사람에게 자리가 돌아간다는 말에
이씨는 얼른 수화기를 들고 중소기업의 전화번호를 눌렀다.

IMF체제 1년간의 최대 화두는 "실업".

이 회오리속에서 평생직장 완전고용의 신화는 산산이 깨지고 한국의
노동시장에는 일대 지각변동이 일어났다.

실업태풍은 맨 먼저 평생직장의 개념을 깨버렸다.

지난 9월말 현재 실업자수는 정부통계만으로도 1백57만명.

지난해 11월이후 하루 평균 3천7백명이 직장을 잃고 거리로 내몰린 셈이다.

안정적인 직장의 대명사로 꼽혀오던 은행도 예외는 아니었다.

금융권 구조조정의 회오리속에 97개 기관이 문을 닫고 3만여명이 실직했다.

직장인들 사이에는 지금 다니고 있는 직장이 "평생 직장"이 아닐 수도 있다
는 인식이 급격히 확산되고 있다.

특히 지난2월 노.사.정합의에 따라 정리해고제와 근로자파견제가 도입됨
으로써 노동시장은 유연성이 높아지게 됐다.

그만큼 직장인들은 직장에서 언제라도 쫓겨날 수 있는 존재가 된 것이다.

<> 정리해고제 도입으로 쉬워진 감원 =지난 7월 세계의 이목이 집중된
가운데 벌어졌던 현대자동차파업의 최대 쟁점은 정리해고제 인정여부였다.

파업결과 정리해고의 이름으로 직장을 떠난 직원은 고작 2백77명에
불과했다.

그러나 정리해고가 있음으로 해서 명예퇴직을 감수할 수 밖에 없었던 인력
은 회사측이 밝힌 것만해도 8천명이 넘는다.

정리해고라는 극한적인 처방을 받지않기 위해 명퇴를 신청한 인원이다.

노동부의 집계에 따르면 올들어 8월말까지 명예퇴직이나 권고사직이 아닌
순수 정리해고 근로자는 1천4백4명.

그러나 국민회의 방용석 의원은 지난 국감에서 사업주가 신고하지않은
정리해고자를 합치면 6만명을 넘을 것이라고 추정하기도 했다.

<> 그룹공채 대신 몰래 채용 =대기업인 D사는 지난10월 신입채용 공고를
냈다가 혼쭐이 났다.

사장 등 임원들이 쉽게 거절하지 못할 인사청탁을 수십건씩 받았다.

담당부서는 채용문의 전화로 며칠동안 업무가 마비됐다.

그래서인지 또 다른 D사는 "몰래 채용"으로 신입사원을 뽑았다.

대학교수나 동문 등을 통해 특정 학생만 불러 면접을 보는 방식이다.

원래 경력사원을 뽑을 때 많이 사용하는 방법이었으나 IMF체제이후
대기업에서 신입사원 채용때도 이 방식을 사용하고 있다.

L, S 등 일부 30대 그룹내의 기업도 이런 방식으로 올해 신입사원을
채용했다.

대기업의 채용방식이 이처럼 그룹공채에서 계열사별 수시채용으로 변해
감에 따라 이같은 현상은 당분간 계속될 것으로 예상된다.

<> 해외취업열풍 =지난 8월 전국 64개 대학으로 구성된 전국대학졸업준비
위원회(전졸연)가 삼성동 코엑스에서 98국제채용박람회를 개최한 첫날
5만여명의 대학생들이 몰려들어 박람회장은 인산인해를 이뤘다.

특히 별도로 마련된 해외취업관 부스는 박람회가 끝나는 날까지 최고의
인기였다.

꽉막힌 국내 취업의 문을 해외쪽에서 찾아보겠다는 학생들이 많았던 것이다.

요즘 서점가에서도 해외취업관련 서적은 창업관련 서적과 함께 불티나게
팔리는 인기도서다.

정부가 어학교육비 명목으로 1인당 월 40만원까지 지원해가면서 2만명을
외국기업에 취업시킨다는 방침을 내놓은 것도 이런 열기를 반영한 것이다.

<> 그래도 3D업종은 싫다 =지난 9월 서울인력은행에서는 이색 취업박람회가
열렸다.

이른바 "틈새직종 박람회"였다.

취업대란속의 틈새직종이란 바로 3D업종이었다.

텔레마케터 금형원 선반기술자 프레스조작원 등 14개 직종에서 기업이
뽑겠다는 인원은 7만2천명이나 되는데 구직자는 2만1천명에 불과했다.

3D업종의 구인난은 이달 중소기업청이 5인이상 3백인미만 중소업체 7백50개
를 상대로 중소기업 인력실태를 조사한 결과에서도 여실히 드러났다.

3D업종이 대부분인 20명 미만의 영세소기업의 인력부족률은 11.8%로 평균
인력부족률 1.89%의 6배가 넘는다.

이들 영세소기업 사용자 59.7%가 "3D업종기피로 사람구하기 힘들다"고
대답했다.

3D업종은 재취업교육장에서도 외면당하고 있다.

울산시는 지난 4월부터 매달 선반 열관리 기계조립분야의 학생을 모집
했으나 신청자가 한명도 없어 관련 강좌를 최근 폐강했다.

<> 임금시장의 새로운 변수 연봉제 확산 =IMF의 찬바람이 불면서 일한만큼
만 받아가라는 연봉제같은 성과급제가 기업 및 은행권, 심지어는 공공부문
으로까지 급속히 확산되고 있다.

30대 그룹 가운데 이미 23개 그룹의 상당수 계열사들이 연봉제를 실시하고
있다.

현대는 금강기획 현대자동차 등 4개사가 시행중이다.

삼성은 올해 전 임원에 대해 연봉제를 실시하고 있고 이하 직급은 계열사별
로 시행중이다.

공기업으로는 토지공사가 맨먼저 내년부터 연봉제를 도입하겠다고 선언했다.

57개 정부출연 연구기관들도 기획예산위원회의 방침에 따라 연구실적에
따라 차등을 두는 성과급제를 전면 도입한다.

<> 몸값이 반으로 떨어졌다 =노동부에 따르면 지난 7월 현재 근로자의
실질임금은 지난해 같은 기간에 비해 평균 12.4% 줄었다.

그러나 근로자들이 체감하는 감봉수준은 거의 절반이다.

모 케이블TV에 다니는 입사 2년차인 박모(29)씨는 올 연봉이 1천2백만원.

정확하게 지난해의 절반이다.

교통비 상여금 등이 모조리 날아간데다 본봉마저 깎였기 때문이다.

박씨는 회사가 보조 여사원들을 해고하는 바람에 전화받기에서 복사까지
본인이 직접해야 할 일감이 급증했다.

월급이 뭉텅뭉텅 깎여도 아침에 일어나 출근할 곳이 있다는 사실만으로
위안을 삼는 게 IMF시대 노동시장의 새 풍속도다.

<> 새 직장을 위한 자격증 열기 =새로운 인생을 찾기 위해 정부가 운영
하거나 민간에 위탁한 직업훈련기관 및 학원들은 때아닌 호황을 누리고 있다.

산업인력공단에 따르면 올해 자격증을 취득하려고 시험을 보는 원서접수자들
만 해도 3백만명에 육박하고 있다.

재취업학원에는 취업준비생이나 실직자들이 대부분이지만 현역 직장인들도
적지않다.

특히 금융인들이나 사무직들 사이에서는 미국공인중개사 선물중개사
마이크로소프트자격증 같은 국제자격증을 따려는 붐이 일고 있다.

모두 "지금 다니고 있는 직장이 평생직장이 아니다.

언제 어떻게 다른 직장으로 가야할 지 모른다"는 생각들이 확산되고 있기
때문이다.

< 김광현 기자 kkh@ >

( 한 국 경 제 신 문 1998년 12월 3일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