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경제는 과연 동시 공황의 수렁에 빠지고 말 것인가.

그렇다면 한국은 경제 위기를 어떻게 헤쳐 나가야 하는가.

"경제 원론"의 저자이며 세계경제학계의 원로인 폴 새뮤얼슨 미국 MIT대
교수는 한국 경제가 IMF체제로 편입된지 1년을 맞아 보내온 특별 기고문을
통해 적극적인 개혁만이 글로벌 시대의 생존방법이라는 점을 다시한번 강조
했다.

새뮤얼슨 교수는 일부 서방 경제학자들이 아시아 국가들에 제안하고 있는
외환통제 등 유동성 위주의 대책을 비판하고 시장 경제 체질을 강화하는
것만이 진정한 대안이라고 지적했다.

곤경을 회피하기 위한 일시적인 편법은 경제적 모순만을 심화시켜 상황을
오히려 더욱 비관적으로 몰아 갈 우려가 있다는 것이다.

"글로벌 경제 위기와 한국"을 주제로 한 그의 기고문을 요약한다.

< 뉴욕=이학영 특파원 hyrhee@earthlink.net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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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환 대란에 휘말린지 1년을 맞은 요즘 한국인들은 마치 긴 악몽을 꾸고
있는 기분일 것이다.

그동안의 고도성장을 생각하면 더욱 그러할 것이다.

사실 한국은 환란과 함께 시작된 불황 직전까지 수십년 동안 고도 성장
가도를 질주해 왔다.

그러나 1997년이 끝나가기 불과 수십일을 앞두고 쨍쨍했던 대낮은 돌연
먹구름이 낀 어둠으로 뒤바뀌었다.

한국의 주식시장은 태국과 인도네시아 말레이시아 일본 등에 번진 금융
공황을 뒤따라 곤두박질쳐 버렸다.

한국의 원화 가치 역시 일본 엔화를 비롯한 다른 아시아 통화와 함께 폭락
행진을 시작했다.

일부 재빠른 한국인들은 보유 재산을 서둘러 해외로 옮기는 사태까지
일어났다.

미국 영국 일본 등 해외의 주요 채권 은행들은 한국 기업과 금융기관들에
빌려 준 단기 대출금의 만기 연장을 거부하고 무차별적인 회수에 나섰다.

이같은 일련의 사태 진전은 한국의 주요 산업을 마비 상태로까지 몰아
넣었다.

한국내에서도 지난 1년간 갖가지 원인 진단과 위기 처방이 제시돼 왔다.

"왜 보다 합리적인 경제운용을 못해 왔던가"하는 자성의 목소리도 제기됐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경제학은 정밀한 과학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앞으로의 상황 전개를 정확하게 예측할 수 있는 경제학자나 전문가는 있을
수 없다.

전문가들이 공들여 짜낸 정책이나 경제 프로그램이라 하더라도 예기치
않았던 변수에 의해 뒤틀려지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다.

특히 지난 68년부터 79년까지의 시기와 같이 세계 경제가 스태그플레이션에
빠질 경우 현대의 경제 과학은 아무런 유용한 치유책도 내놓을 수 없는 것이
사실이다.

한 예로 인플레를 막기위해 어떤 처방을 내놔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초보적
인 경제학자라면 누구나 정답을 말할 수 있다.

거시 재정 및 금융 정책을 긴축적으로 운영해야 한다는 것이 그 답이다.

그러나 스태그플레이션 문제로 들어 가면 얘기가 달라진다.

불황(stag)과 인플레(inflation)가 공존하는 스태그플레이션의 상황에서
인플레에 초점을 맞춘 조치를 내놓을 경우 자칫 불황의 골을 더 깊게 만들
가능성이 크다.

반대로 불황탈출에 매달릴 경우 오히려 인플레가 심화될 수 있다.

이처럼 상호 모순적인 경제 현상을 놓고 자칫 지나치게 단순화시킨 처방을
내놓는다면 이는 사태를 돌이킬 수 없는 최악으로 몰아 갈수도 있다.

유감스럽게도 한국에 대해 여러가지 처방전을 내는 서방의 많은 전문가들
에게서 그런 징후가 뚜렷이 나타나고 있다.

하버드대학의 제프리 삭스 교수 같은 사람도 그중 하나다.

그는 "한국의 외환 위기는 유동성 문제에서 비롯된 것"이라는 지나치게
단순한 전제를 세웠다.

따라서 국제통화기금(IMF)을 비롯한 국제 기관들이 한국으로 하여금 외채
만기를 연장할 수 있을 만큼의 구제 금융을 해준다면 한국은 다시 두 자리
수의 성장 가도에 재진입할 수 있을 것이라는게 그의 주장이었다.

이 주장이 맞는 것이라면 인도네시아나 말레이시아에 대해서도 같은 이론이
적용돼야 했다.

그러나 과연 그런가.

IMF는 이처럼 단순 명료한 진리도 모르는 어리석은 기관이었단 말인가.

또 다른 전문가들은 한국을 비롯한 아시아 국가들의 불안정한 환율 시스템
이 외환 위기를 가중시키고 있다며 고정 환율제로의 복귀를 권고하고 있다.

통화보드제(Currency Board)를 도입하고 외환을 통제하는 것이 금융 및
외환 시장을 안정시키는 지름길이 될 것이라는 얘기다.

그러나 내가 볼 때는 이것처럼 황당한 주장도 없다.

만약 한국이 고정 환율제를 실시한다면 장담컨대 1-2주일 내에 환율 시스템
이 다시 붕괴되고 말 것이다.

게다가 한국의 납세자들은 다음 세기에 접어들어서도 다 갚지 못할 만큼의
외채 상환 부담을 추가로 안게 될게 분명하다.

한국 내에서도 갖가지 무책임한 주장을 펴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좌익 공상가들은 근로자와 노동조합을 향해 모든 형태의 정리 해고에 저항
하도록 부추겨 왔다.

만일 이런 선동이 호응을 얻었었다면 한국의 기업 도산이나 정리 해고
비율은 지금보다도 훨씬 높아졌을 것이다.

안타깝게도 한국의 관료들은 아직도 과거와 유사한 실수를 반복하고 있다.

일본 관료주의 모델을 답습했던 경제 관료들은 여전히 일본 대장성내
법률주의자들의 행태를 모방하기에 급급한게 현실이다.

한국이 1년이 넘도록 계속되고 있는 악몽에서 벗어나려면 이 모든 관성의
굴레에서 벗어나야 한다.

그러기 위해선 우선 한국 경제가 처한 상황을 냉정하게 성찰할 필요가 있다.

만약 한국의 경제 위기가 다른 나라들은 다 멀쩡한 가운데 국제 핫머니의
일시적인 투기에 의해 촉발됐거나 단지 주요 산업의 불황에 의해 비롯된
것이었다면 상황은 훨씬 희망적이었을 것이다.

가령 일본의 올해 국내총생산(GDP)이 연 7%대로 회복됐거나 다른 아시아
국가들의 외환 위기가 불식됐다고 치자.

그랬다면 한국의 원화 폭락은 제조업체들에 수출 경쟁력을 대거 강화시켜
주는 무기가 됐을 것이다.

하지만 상황은 전혀 그렇지 않았다.

아시아에서 촉발된 외환 위기는 오히려 확산 일로를 걸었고 러시아를 거쳐
중남미 국가들까지 가닿았다.

비록 유럽과 북미의 실물 경제가 아직은 건재하다고 하지만 금융 시장의
상황은 그리 간단치 않다.

더구나 롱텀캐피털 인베스트먼트라는 헤지 펀드에 대해 미국 금융 당국이
취한 구제 금융 조치는 국제 자본시장에 엄청난 충격파를 가했다.

이런 일들은 가뜩이나 여러 지표에서 빨간 신호를 켜놓고 있는 미국 경제가
본격적인 경기 하강 국면으로 빠지는 것 아니냐는 우려를 높여 놓고 있다.

뿐만 아니다.

달러의 급격한 약세와 이로 인한 미국내 외국인 투자 자금의 철수 움직임
등이 겹쳐지면서 미국인들의 경기 신뢰지수도 급격히 낮아지고 있다.

"설마"했던 경기 불황론이 미국인들 사이에서도 확산되는 조짐을 보이고
있다.

만에 하나 미국이 본격 불황에 빠진다면 한국 경제는 결정적인 타격을 입을
가능성이 높다.

한국 뿐만이 아니라 세계 경제 전체가 "동시 공황"의 회오리 속으로 빠져
들 공산이 크다.

일본이 스스로의 문제에 발목이 붙잡혀 있는 상황에서 미국은 "세계 경제
최후의 피난처"로 활약해 왔다.

사정이 이런데도 워싱턴은 정쟁에 빠져 많은 귀중한 시간들을 허비해 왔다.

클린턴을 스캔들의 함정에 밀어 넣는 것은 미국은 물론 세계 경제 전체를
위해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미국 경제의 방향타를 쥔 사람은 워싱턴의 연방 정부나
의회의 정치인들이 아니라 앨런 그린스펀 연방준비제도 이사회 의장이라는
사실이다.

그는 지난 11년 동안 거시 금융정책을 안정적으로 운영하는데 있어
놀랄만한 수완을 발휘해 왔다.

87년 10월 뉴욕 증시가 대폭락한 이후 그린스펀은 점진적인 이자율 인하를
통해 미국 경제 전반에 짙게 드리워져 있던 불황의 그림자를 걷어냈다.

지금 미국과 세계 경제는 다시 한번 그의 수완에 기대를 걸고 있는 양상
이다.

그린스펀이 어떤 수완으로 미국과 세계 경제를 벼랑에서 건져낼 수
있을지는 더 두고 보아야 할 일이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한국의 현 위기는 고립적으로 일어난 것이 아니라
급속한 세계 경제의 통합화 과정에서 심화됐다는 점이다.

따라서 한국이 위기를 벗어나기 위해서는 세계 경제의 전개 상황을 면밀히
주시하면서 "경제 원론"에 맞는 개혁을 주저 없이 지속해야 한다.

고정 환율제의 도입이나 일시적인 유동성 확보를 통해 곤경을 회피하고자
하는 유혹을 떨쳐 내야 한다.

돌이켜 보면 한국을 비롯한 아시아 국가들은 이제까지 진정한 의미의 시장
경제를 시행해 본 적이 없다.

정부의 정책 독점과 특정 산업 및 기업에 대한 비호라는 편법에 의존해
고도 성장을 달성해 왔다.

이는 세계 경제가 일정한 경계에 의해 상호 고립적으로 움직일 수 있었던
시대의 산물이다.

그러나 지금은 부인할 수 없는 글로벌 통합의 시대다.

국제 투기의 주범으로 비난받고 있는 헤지 펀드들은 자유롭게 국경을
넘나들면서 가장 수익성이 높은 시장을 좇아 다닌다.

헤지 펀드처럼 각국의 경제 상황을 냉철하게 꿰뚫어 보는 존재도 없다.

헤지 펀드의 자금이 몰렸다가 빠져 나가는 국가는 그만한 내부적인 문제가
있기 때문이라는 점을 부인해서는 안된다.

한국이 인식해야 할 대목은 바로 이것이다.

정부는 경제 운영에 관한 필요 최소한의 통제 장치는 유지해야 하겠지만
외환 투자 무역 등은 시장 경제 원리에 입각해 과감하게 자유화하고 개방
해야 할 것이다.

글로벌 위기가 심화되면 될수록 개방과 자유경쟁이라는 담금질을 통해
단련된 체제만이 시련을 가장 슬기롭게 헤쳐 나갈 수 있는 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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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새뮤얼슨 누구인가 ]

폴 새뮤얼슨 교수는 신고전파 경제학자로 너무도 잘 알려져 있다.

"경제이론분석의 기초(47년)"를 비롯한 순수 경제이론은 물론 전후 중요
정책문제에 관한 수많은 선구적 논문을 써서 이미 30대초반에 세계적 석학의
대열에 올랐다.

노벨경제학상이 그를 위해 만들어졌다고 할 정도였다.

행동주의적 지식인을 자칭하면서 역대 미국 대통령 경제 자문위원회 고문을
비롯, 각종 정부 자문기관 등으로 일했다.

이외에도 TV 라디오 신문 잡지 등에 정기적으로 기고하며 정력적 활동을
과시한 인물로 잘 알려져 있다.

그의 대표작으로 꼽히는 "경제학"(48년)은 이미 12차례 개정판이 나왔는데
특히 85년 12차 개정판에서는 케인즈 이론에서 탈피, 통화주의적 입장을
과감히 수용함으로써 주위를 놀라게 하기도 했다.

새뮤얼슨의 경제학은 MIT대학의 경제학풍으로 자리잡고 있다.

국제금융 이론가인 스탠리 피셔 국제통화기금(IMF) 부총재는 MIT대학 교수
재직시절 새뮤얼슨의 전도사를 자칭할 정도였다.

최근 "경제학 원론(Principles of Economics)"을 써 경제하계의 주목을
받고 있는 그레고리 맨큐 하버드대학 교수도 새뮤얼슨의 영향을 받았고
노벨경제학상을 수상한 로버트 솔로 MIT 명예교수도 동료이자 후배로서 그의
후광을 입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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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약력 ]

- 1915년 미인디애나주 개리시 출생
- 1935년 시카고 대학 졸업
- 1936년 하버드 대학 석사
- 1941년 하버드 대학 경제학 박사
- 1947년 MIT 대학 교수
- 1970년 노벨 경제학상 수상
- 현재 MIT 대학 교수


( 한 국 경 제 신 문 1998년 12월 3일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