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동산은 의.식.주중 하나로 우리 생활과 항상 함께 하고 있다.

그러나 항상 숨쉬는 공기를 잘 의식하지 못하듯 삶의 토대인 부동산에
대해서도 모르는게 많다.

알아두면 재미있고 유익한 부동산 상식을 국토개발연구원 정희남 박사를
통해 알아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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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동산 개념이 바뀐다

부동산은 "토지와 그 위에 있는 정착물"로 정의된다.

그러나 원래 부동산은 토지만을 의미했다.

토지위에 있는 건물은 토지에 딸린 것으로 보았다.

오늘날에도 토지와 건축물을 구분해 등기하고 있는 나라는 한국 일본 중국
베트남 등 일부 국가에 불과하다.

부동산은 움직이지 않는다는 특성을 갖고 있다.

그러나 과학이 발달하면서 오늘날에는 움직이는 부동산도 나타났다.

미국에서는 모빌홈(mobile home)이 부동산으로 인정된다.

모빌홈은 대형트럭에 견인되거나 적재돼 이동할 수 있도록 만들어진
소형주택으로 독립된 주거생활을 영위할 수 있게 꾸며진 완전한 생활공간
이다.

우리나라에서 부동산이라는 용어는 1906년 "부동산조사회"와 "조선부동산
증명령"에서 처음 사용됐다.

이후 1912년 "부동산등기령"이 제정되면서 부동산이라는 용어가 일반화됐다.

<> 부동산의 어원

오늘날 부동산은 부의 상징이다.

그러나 당초에 부동산은 신분의 상징이었다.

부동산은 영어(real estate)를 번역한 말이다.

"estate"는 신분을 의미하는 라틴어 "status" 에서 나왔다.

다시 말해 부동산은 그 사람의 "진정한 신분(real estate)"을 보여주는
것이다.

토지를 갖고 있는 사람만이 움직일 수 없는 부동의 진정한 신분이었다.

토지를 갖지 못한 사람은 진정한 신분이 아닌 노예나 농노였다.

부동산과 연관돼 있지 않고 그 사람의 인격에 기초한 신분은 후에
"personal estate" 라고 했다.

이 말은 오늘날 동산이라고 번역돼 사용된다.

IMF구제금융 이후 중산층이 몰락하고 있다는 보도가 잇따르고 있다.

부동산 가격의 하락과 함께 그 사람의 진정한 신분도 하락하고 있다는
말이다.

<> 토지투기는 기원전부터

60년대이래 우리 토지시장 문제의 핵심은 투기라고 지적돼 왔다.

토지투기가 처음 일어난 때는 로마시대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기원전 264~202년까지 로마는 한니발이 인도한 카르타고와 두 차례의
포에니전쟁을 치렀다.

이 전쟁에서 승리한 로마는 적군의 토지를 귀족과 군인에게 하사했다.

이때 로마 귀족은 토지투기를 통해 막대한 부를 축적했고 투기에서
벌어들인 돈으로 로마에서 여유롭게 생활했다.

<> 투기가 공산당 불렀다

주택투기의 효시도 로마시대였다.

로마공화정이 서구를 지배하면서 로마에 인구가 집중됐다.

귀족과 장군 등 대규모 토지소유자들이 로마에 2~3층의 연립주택을 대량
공급하면서 주택투기가 성행했다.

이들 주택은 불량하고 밀집된 탓에 로마는 주기적으로 화재가 발생했다.

로마 화재의 결정판은 서기 50년대 네로 황제때 일어났다.

1848년에 마르크스와 엥겔스가 발표한 공산당선언은 주택투기와 깊은
관련이 있다.

이 당시 영국은 산업혁명이 진행되고 있었고 그 과정에서 수많은 농민이
도시에 몰려와 산업근로자가 됐다.

그 결과 주택이 부족하게 됐다.

투기꾼들은 이 기회를 이용해 4~5층 규모의 연립주택을 대량으로 공급했다.

그들은 이익에만 눈이 멀어 이들 주택에 위생시설마저 갖추지 않았다.

마치 60~70년대 우리나라 공장근처에 있었던 "닭장"과 같았다.

마르크스는 런던 빈민가에서 일어나고 있는 주택투기의 실상과 그로
인한 근로자의 비참한 생활을 지켜보고 자본주의의 폐해를 지적하게 됐다.


<> 빌라는 로마시대 시골집

오늘날 도시 안에 있는 고급 연립주택을 빌라라고 한다.

그러나 원래 빌라는 기원전 2세기 로마시대에 시골집에서 아주 초라하게
시작했다.

진흙으로 만든 오두막집에 주인과 소작인, 그리고 농장 동물들이 함께
살았다.

불과 몇십년 전의 우리나라 시골집 풍경을 연상하면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로마 공화정 후기에 빌라는 시골에 지은 화려한 주택이 됐다.

이들 빌라는 대부분 도시 사람이 소유했다.

점차 빌라는 요새화됐고 중세 봉건주의가 진전되면서 지방행정의 중심이
됐다.

<> 보이콧은 토지개혁에서

서양에서 실시된 최초의 토지개혁은 기원전 575년 그리스의 솔론이
추진했다.

이때 농민의 빚은 탕감됐지만 토지분배가 실현되지 않았다.

동양에서는 서기 9년에 한나라의 왕망이 최초로 토지개혁을 실시했다.

왕망은 1인당 1천2백평씩의 농지를 분배했다.

그러나 3년후 토지개혁은 무효화됐다.

현대에 들어와 토지개혁은 흔히 대규모 학살을 수반했다.

러시아에서 1929년부터 실시한 집단농장화 과정에서 적어도 2천만명의
지주(쿨락)가 학살됐다.

1949년에 시작된 중국의 농지개혁에서도 5천만명 이상의 농민과 지주가
죽었다.

한편 1879년 아일랜드는 토지개혁을 시도했다.

이 과정에서 영국인 지주의 토지를 관리하던 찰스 보이콧은 소작료 인하를
거절하고 소작인을 쫓아냈다.

농민들은 그를 배척했다.

이후 노사분규에서 흔히 나타나는 배척운동 또는 불매운동을 그의 이름을
따서 보이콧이라고 불렀다.

<> 역사상 최대부동산 소유자

역사상 토지를 가장 많이 소유한 집안은 아르헨티나의 안코레나 가문이었다.

1856년 이 가문이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보유한 농지는 75억6백81만평
이었다.

1995년 현재 우리나라의 농지 총면적은 66억평이고 전 국토 면적은
3백억평이다.

우리나라 총 농지보다 넓은 토지를 한 가문이 갖고 있었다.

그러나 만경의 토지를 갖고 있는 지주도 죽었을 때 묻힐 땅은 1평이면
족하고 만석군의 식탁에도 한끼에 세 홉이면 족하다.

<> 적정한 도시는 직경 1마일

인류가 이룩한 최대혁명은 도시혁명이라고 한다.

이때 도시의 적정규모는 마이크 없이 사람의 목소리로 의사소통이 가능한
반경 6백~8백m의 넓이(34만~60만평)로 보았다.

이 원의 지름(1.6km)은 후에 1마일로 결정됐다.

최초의 도시국가는 기원전 3천년께 메소포타미아의 우르였는데 이 도시의 규
모는 38만평이었다.

기원전 5세기에 그리스의 도시국가는 민주주의의 산실이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국가론"에서 이상적인 도시규모를 2만~3만명이 거주할
수 있는 30만평으로 보았다.

중세 봉건주의 절정기인 9세기에 파리 근처에 있는 대영주가 보유했던
영지의 평균 규모는 27만평이었다.

산업혁명의 폐해를 극복하고자 1929년 페리는 근린주구라는 개념을
제시했다.

이 개념의 이상적인 규모는 주민 5천명이 거주할 수 있는 20만평이었다.

1985년의 연구결과 우리나라에서 최대의 경제적 효율성을 보여주는
도시개발 규모는 42만평으로 나타났다.

오늘날 가장 이상적인 도시규모는 인구 30만~40만명의 중규모 도시라고
한다.

우리나라에서도 많은 신도시가 이 규모로 만들어졌지만 불행하게도
이들 도시는 자급자족할 수 없는 베드타운으로 전락했다.

<> 사회의 어원은

토지에서 나왔다 토지의 신을 사라고 불렀다.

사직단은 토지 신과 곡식 신에게 제사를 드리는 곳이다.

봄에는 농사를 잘 짓게 해달라고 춘사일에, 그리고 가을엔 수확을 감사하며
추사일에 제사 드렸다.

춘사일은 춘분지나고 처음 찾아오는 무일, 그리고 추사일은 추분 지나고
처음 찾아오는 무일을 말한다.

무는 흙을 상징한다.

25개 가구를 중심으로 토지신에 제사 지내기 위해 조직한 모임을 사회라고
했다.

오늘날 우리가 사람의 모임을 사회라고 하지만 그 기원은 토지와 연계된
것이다.

<> 토지소재 베스트셀러 많다

우리나라 사람의 토지애착은 유별나다고 한다.

심지어 문학작품의 이름에도 토지와 땅이 들어갔으며 베스트셀러가
되기도 했다.

건국이래 뛰어난 소설로 선정된 53개 소설중 1위는 박경리의 장편
"토지"였으며 마지막은 임철우의 단편 "아버지와 땅"이었다.

노벨문학상을 받은 펄벅여사의 작품이름도 "대지"였다.

<> 토지에 얽힌 말 말 말.

인간에게 죽음 다음으로 최악의 운명은 자기 토지가 없어서 다른 사람의
토지에서 일해야 하는 것이다(호머의 오디세이).

토지는 인간사에서 가장 강력한 힘을 갖고 있다(기원전 400년 유리피데스).

재산은 개인의 능력을 배가시킨다(1764년 볼테르).

모든 백만장자의 90%이상은 부동산 때문에 백만장자가 됐다(카네기).

미래의 부는 부동산을 통해서 얻어질 것이다(록펠러).

토지는 정치의 근본이다.

그러므로 토지로 정치를 바로 잡아야 한다.

토지가 고르지 못하고 조화를 잃으면 정치는 어지러워질 수밖에 없다
(지자정지본야 시고지가이정정야 지부평균조화칙정가정야, 관자).

[ 정희남 박사 약력 ]

미국 하와이대에서 정치학박사를 취득한뒤 미국 조지타운대에서 규제정책
및 경제정책과정을 수료했다.

한국토지공사와 하와이 동서문학센터에서 근무했으며 85년부터 국토개발
연구원 연구위원으로 재직중이다.

현재는 청와대 경제구조조정기획단에 파견근무중.

"거시경제정책이 토지시장에 미치는 영향" "기업관련토지정책의 개선방안
연구" "사회주의 국가의 토지개혁 연구" 등 24권의 연구보고서를 발간했다.

( 한 국 경 제 신 문 1998년 10월 19일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