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효석(1907~1942)의 문학에 대한 비평가들의 긍정적 평가는 뒤늦게 70년대
후반에 와서야 본격적으로 이루어지기 시작한다.

김윤식과 김현의 공저로 73년에 출간된 "한국문학사"에는 그와 관련된
항목이 없다.

권말 색인에도 그의 이름은 보이지 않는다.

그가 좌익이념의 동반자작가로 문단에 데뷔했고 순수문학으로 돌아선 뒤에도
심미주의로 일관해 문학을 현실도피의 도구로 삼았다는 부정적 편견이 평단을
지배하고 있었던 탓이다.

그동안의 경위야 어떻든 지금 이효석은 탁월한 순수 심미주의 작가로
평가받고 있다.

고향을 무대로 한 향토적 정서표현과 인간의 원초적 에로티시즘을 추구했던
그의 작품세계를 어떤 비평가는 "향수문학"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홀대받던 이효석의 문학이 뒤늦게나마 제자리를 찾기까지는 많은 비평가들의
연구가 뒷받침됐다.

특히 유족중 큰딸 이나미씨가 부친의 재조명과 기념사업을 위해 기울인
수십년의 노력은 눈물겹다.

아마 이효석의 고향인 평창군민들의 지원도 한몫 톡톡히 했을 것으로
보인다.

이제 메밀꽃을 보면 누구나 이효석을 연상할 정도로 어느 작가보다 그는
널리 알려져 있다.

그의 생가가 있는 평창군 봉평읍은 주말이면 "메밀꽃 필 무렵"의 무대를
찾는 관광객으로 붐빈다.

그는 평창군의 상징이 돼버렸다.

봉평은 요즘 메밀꽃이 한창 흐드러지게 필 때다.

하지만 때마침 그곳에서 날아든 이효석의 묘 이장을 둘러싼 유족과 현지
주민들의 분쟁소식은 우리들을 우울하게 한다.

묘지관리를 제대로 못해 유족들이 끝내 이장을 결심하게 한 군의 책임이
크겠지만 이장을 저지하는 주민들을 상대로 법적대응을 해서라도 해결
하겠다는 유족들의 고집도 순리를 따르는 온당한 처사같아 보이지는 않는다.

무엇보다 왜 이효석이 고향을 두고 타향인 파주의 실향민묘지에 묻혀야
하는지는 좀처럼 이해하기 어렵다.

봉평의 생가 인근 가산공원으로 이장한다면 흉상 문학비와 함께 관리하기도
쉽고 관광객이 참배하기도 편할 것 같은데...

( 한 국 경 제 신 문 1998년 9월 7일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