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견그룹 계열사인 A사의 김과장은 요즘 폭우를 보면서 "휴가 안간게
다행이야"라고 자위한다.

그렇다고 김과장이 진짜 휴가를 안간건 아니다.

못갔다는게 정확한 표현이다.

임원들이 휴가를 반납하고 나서는 통에"강제반납"당한 것이다.

임원들을 이해 못할바도 아니다.

회사가 생사의 갈림길에 서 있는데 휴가를 간들 마음이 편할리도 없다.

그룹의 구조조정안에 따르면 김과장이 속한 계열사는 곧 사라지게 된다.

그냥 폐업할지, 주력사에 통폐합될지도 명확치 않다.

"이런판에 휴가를 가고 싶냐"는 임원들의 말도 일리가 있다.

하지만 회사에 나온다고 뾰족한 수가 있는 것도 아니다.

영업은 이미 개점휴업상태다.

일손이 잡힐리도 없다.

삼삼오오 모여 감원걱정뿐이다.

"가자니 찝찝하고, 안가자니 섭섭하다"(H그룹 P차장).

올 휴가시즌 샐러리맨들의 분위기는 이 한마디로 요약된다.

감원, 계열사 통폐합, 회사매각등 기업 대수술이 진행되고 있기 때문이다.

임원정도면 "휴가"란 단어를 머릿속에서 지워버려야 한다.

그룹총수들도 휴가를 반납한 판에 임원들이 쉴수는 없는 노릇이다.

가장 애매한게 부 과장급 중간관리자들.

"책상 없어질까 무서워서 어디 휴가 가겠냐"(S그룹 Y차장)는 말이 농담만은
아니다.

휴가를 안간다고 감원대상에서 제외된다는 보장도 없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속만 앓고 있다.

돈으로 휴가를 보상받는 것도 아니다.

월급도 깍인판에 휴가비가 없어진건 당연하다.

50% 특별보너스를 주던 삼성, 15만원씩 지급하던 현대등 거의 대부분
기업들이 휴가비지급을 중단했다.

효성그룹도 계열사별로 15만~20만원씩 주던 휴가비를 없앴다.

그나마 휴가를 가는 직원들도 고작 3~4일 쉬는 정도다.

대개 5~6일 가던 휴가일수가 올해는 3~4일정도로 줄었다.

그야말로 황량한 바캉스 시즌이다.

"배짱파"로 소문난 S사의 최부장도 올해만큼은 휴가를 포기했다.

다른 부장들이 웃사람 눈치보느라 휴가얘기를 못꺼낼때도, 용감하게
휴가를 찾아먹던 그였다.

그런 최부장의 강심장도 올여름엔 쪼그라들었다.

1만명을 감원한다, 계열사를 대폭 줄인다는등 흉흉한 소문때문이다.

"그래도 굴지의 대기업인데 별일 있으랴..."며 직속상사를 찾아간 것은
2주일전."

상무님 휴가 안가십니까"하고 은근히 말을 꺼냈다가 "제정신이냐"는
핀잔만 들었다.

"사무실에서 보내는 여름휴가"도 IMF시대 샐러리맨들의 바캉스
풍속도로 등장했다.

D그룹 박차장은 "휴가는 반드시 가라"는 회사방침에 바캉스 계획을
세웠었다.

그러나 직속상사인 김이사가 휴가 첫날 출근하면서부터 박차장의 꿈은
깨졌다.

김이사는 박차장에게도 휴가반납을 은근히 강요했다.

"요즘같은때에..."

결국 박차장은 휴가를 사무실에서 보내고 있다.

민영화 태풍에 휩싸인 공기업도 분위기가 험악하기는 마찬가지다.

공기업 H사의 권대리는 최근들어 공기업에 입사한게 은근히 후회된다.

일반 기업체에서는 직원들이라도 휴가를 간다는데 H사에는 아예
휴가금지령이 내려졌다.

몇달전 "휴가를 되도록 가지 말라"는 사장지시가 떨어진 것.

권대리가 소속된 기획과 직원 8명중 휴가를 간 사람은 1명도 없다.

그래도 누구하나 소리내 불평하지 않는다.

"감원만 안된다면 휴가반납이 대수겠습니까"(권대리).

요즘 한국 샐러리맨들의 심정이다.

< 노혜령 기자 hroh@ >

( 한 국 경 제 신 문 1998년 8월 11일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