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전혁 < 인천대 교수. 경제학 jhcho@lion.inchon.ac.kr >

유러화 출범이 공식화되자 일본은 매우 민감한 반응을 보였다.

향후 세계 기축통화의 한 자리는 유러화가 차지할 것이다.

이 경우 엔화는 국제무대에서 설 자리를 잃게 된다.

최근 일본의 고위정책당국자들이 "엔 국제화"를 추진하겠다고 밝힌 것은
이러한 위기감을 반영한다.

엔이 국제화된다면 일본은 막대한 정치.경제적 혜택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혜택에는 비용도 수반된다.

통화의 국제화를 위해서는 몇가지 선행조건이 있다.

첫째 국가경제의 기초가 튼튼해야 한다.

둘째 강력하고 효율적인 국제금융시장을 보유해야 한다.

셋째 해당 정부의 정책이 세계의 신뢰를 받아야 한다.

넷째 국제적인 경제충격을 적극적으로 진화하려는 대승적 자세를 가져야
한다.

이런 잣대에서 본다면 엔의 국제화는 멀어도 한참 멀었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특히 최근 아시아 금융위기와 엔.달러 환율의 급등 과정에서 일본이 보여준
일련의 행동은 엔을 거꾸로 "국지화"시키려고 발버둥치는게 아닌가 의심케
한다.

현재 일본경제는 전후 최악의 불황에 시달리고 있다.

대대적인 경기부양책에도 경제는 미동조차 않는다.

더 큰 문제는 경제시스템이다.

비평가들은 일본경제가 제대로 구조조정되지 않으면 미래가 없다고 단언한다

그런데 이 구조조정이 기대난망이다.

금융시스템은 더 불안하다.

거품붕괴 과정에서 생긴 막대한 부실채권이 경제의 목줄을 죄고 있다.

일본의 국제금융시장은 고비용 비효율 때문에 국제금융기관들로부터 외면을
받아왔다.

때문에 일본기업-일본금융회사-일본투자자를 연계하는 증권 발행에 유러시장
이 이용되는 기현상도 종종 발생한다.

오늘날 일본의 번영은 국제무역을 통해서 창출되었다.

그러나 일본은 각종 제도.비제도적 장벽으로 국내시장을 중무장시키고 있다.

공정치 못한 무역관행에 대한 세계의 지탄에도 아랑곳 않는다.

게다가 과거사 문제는 아시아 이웃의 심적 거부감을 자극한다.

때문에 일본의 정책은 세계의 신뢰를 얻지 못하고 있다.

아시아 경제위기 이후 보여준 행동은 신뢰감과는 거리가 더욱 멀다.

일본은 수출의 40% 이상, 무역흑자의 65% 이상을 아시아에서 얻어왔다.

그러나 위기해결을 위해 무엇보다 수출확대가 절실한 아시아 이웃으로부터의
수입을 오히려 줄이고 있다.

외환위기가 발발하면서 대아시아 여신을 가장 먼저 회수한 것도 일본의
금융기관들이었다.

자금회수로 넘쳐나는 돈은 일본 국내금리를 거의 0%로 떨어뜨렸다.

미.일 금리차는 더 커지고 일본의 돈은 급속히 미국으로 흘러간다.

최근 엔.달러 환율의 불안도 여기에서 기인한다.

엔 불안은 힘들게 경제위기를 추스려 가고 있는 아시아에 계속 고통을
강요한다.

최근 세계화의 급진전으로 세계경제는 유례없는 "통합의 시대"에 들어가고
있다.

한 나라의 경제는 더 이상 이웃과 세계의 곤란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

일본과 같은 경제대국은 더더욱 그러하다.

엔 국제화는 일본의 지도층이 이러한 인식에 공감할 때야 비로소 싹을 틔울
수 있을 것이다.

( 한 국 경 제 신 문 1998년 7월 27일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