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준구 < 서울대교수/경제학 joonklee@plaza.snu.ac.kr >

우리 축구팀이 네덜란드의 거센 공격에 힘없이 무너지는 광경을 보면서
세계의 높은 벽을 또 한번 실감하게 되었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서 16강 진출을 꿈꿔 보았지만 역시 승부의 세계는
냉혹한 것이었다.

실력의 격차가 클 때 이를 메울 수 있는 방법은 그 어느 것도 없다는 사실을
뼈저리게 느낄 수밖에 없었다.

세계의 높은 벽 앞에서 좌절한 우리 축구팀을 보면서 분수를 모르고
나대다가 국가부도 일보직전까지 몰렸던 우리 경제의 딱한 모습을 떠올렸다.

그 실력으로 16강 운운했던 것이 지금 생각해 보면 우습기 짝이 없는
일이었다.

얼마 전까지 세계11위의 경제력을 가졌다는 둥, 멀지않아 선진국 클럽인
G7에 합류한다는 둥 떠들어대던 것 역시 우스운 일이었다.

그 근거없는 자만이 오늘의 위기를 불러온 주된 원인이 아니었을까.

당연한 말이지만 냉엄한 승부의 세계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경쟁에 이길
수 있는 실력을 배양하는 것 이외에 다른 방도가 없다.

실력이 달리는 팀이 요행으로 한두번 이길 수 있을지 몰라도 언젠가는
무릎을 꿇게 되어 있다.

마찬가지로 경쟁능력을 갖추지 못한 경제가 잠깐동안은 꾸려갈 수 있어도
얼마 안있어 곧 그 한계를 드러내게 마련이다.

축구든 경제든 세계무대에서 겨루기 위해서는 하루빨리 우물안 개구리의
습성을 내던져야 한다.

우리 축구선수들이 국내 프로리그에서의 우승을 유일한 목표로 삼고, 우리
기업들이 국내시장을 석권하려는 꿈에 취해 있는 한 세계의 강적들과 맞설
능력을 쌓을 수 없다.

고만고만한 경쟁상대와 도토리 키재기나 하던 습성을 청산하고 드넓은
세계로 눈을 돌려야 세계 일류의 반열에 오를 수 있다.

또한 세계에서 통용되는 게임의 규칙을 재빨리 우리의 것으로 만드는
발빠른 적응능력을 발휘해야 한다.

대멕시코전에서 나온 무모한 백태클 하나가 우리 팀에 미친 충격을 생각해
보면 이것이 얼마나 중요한 일인지 잘 알 수 있다.

국제축구연맹이 백태클을 엄하게 규제하겠다고 거듭 경고했는데도 이에
제대로 적응하지 못해 그런 순간적 실수가 나온 것이다.

우리 경제 안에도 하루빨리 청산해 버려야 할 갖가지 백태클이 난무하고
있다.

거의 고질처럼 되어버린 병폐들, 즉 부조리 비합리성, 그리고 불투명성
같은 것들이 바로 축구의 백태클에 해당하는 것들이다.

기업들이 전세계시장을 활동범위로 삼고, 자본이 국경을 마음대로 넘나드는
세계화된 경제질서에서는 이런 것들이 결코 허용되지 않는다.

세계의 투자가들은 우리에게 가차없이 레드카드를 내밀었고 이로 인해
오늘의 경제위기가 시작된 것이다.

우리 스스로 모든 부조리를 몰아내고 합리적이며 투명한 경제를 만들지
않는 한 세계의 투자가들은 계속 우리를 외면할 것이다.

지금 우리 사회에서 불고 있는 개혁의 바람은 바로 이 점에서 중대한
의미를 갖는다.

개혁의 목표가 고작 부실기업이나 금융기관을 정리하고 재벌구조를
변화시키는 데 있는 것이 아니다.

개혁의 궁극적 목표는 그동안 우리 경제를 옥죄고 있던 일체의 부조리
비합리성 불투명성을 말끔히 씻어 버리는 데 있다.

그러나 아직도 이런 대세를 읽지 못하고 엉뚱한 소리나 늘어놓는 사람이
많다.

우리나라는 선진국과 다르다.

그렇기 때문에 IMF가 요구하는 구조개혁은 우리에게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말하는 사람이 그 좋은 예다.

소견이 좁아 그렇게 말하는 것인지, 아니면 지금까지 얻어왔던 이득을
포기하기 싫어 그러는 것인지 잘 모른다.

한가지 분명한 것은 그런 우물안 개구리 식의 대응이 우리 처지를 더욱
어렵게 만들 뿐이라는 사실이다.

우리 축구팀이 참패하고 난 후 기초부터 다시 시작하자는 자성의 소리가
나왔다.

물론 옳은 말이다.

위기에 빠진 경제 역시 기초부터 다시 시작하는 기분으로 바로 잡아나가지
않으면 안된다.

4년 후의 월드컵에서 화려하게 재기할 우리 축구팀을 꿈꾸듯, 위기를 극복
하고 힘찬 걸음으로 세계무대에 복귀하게 될 우리 경제를 꿈꾸어 본다.

( 한 국 경 제 신 문 1998년 7월 15일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