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석주 < 시인/문학평론가 >

그것은 세계인을 하나로 묶는 6월의 축제였다.

지구상에 사는 50억의 눈과 귀가 월드컵이 열리는 프랑스로 쏠려 있다.

한국의 11명의 전사들은 열심히 싸웠다.

대멕시코전에서 하석주 선수가 절묘한 프리킥으로 한골을 선취했을 때
우리는 월드컵출전사상 첫승에의 꿈으로 부풀었다.

곧이어 하석주 선수가 백태클 반칙으로 퇴장되었을 때 그 꿈은 악몽으로
바뀌며 산산이 부서졌다.

우리는 역전패했고, 밤잠을 설치며 텔레비전앞에 모여 있던 국민들은
울분을 터뜨렸다.

한쪽에서는 차범근 감독을 퇴진시켜야 한다는 볼멘 소리가 터져나왔다.

시종 허둥대며 쩔쩔 맨 선수들에 대한 질책이 쏟아지기도 했다.

예기치 않은 돌발 상황속에서 우리 선수들이 당황해하며 제실력을 충분히
발휘하지는 못했지만, 우리 선수들은 최선을 다했다.

우리는 첫승에의 기쁨을 네덜란드 전으로 유예했다.

우리는 다시 텔레비전 화면앞에 다가앉으며 우리 선수들의 선전을 기원했다.

우승후보로 꼽히는 빅4중의 하나인 오렌지군단 네덜란드선수들을 맞아
우리 선수들은 근육에 남아 있는 마지막 힘을 다 소진시켜가며 열심히
싸웠다.

그러나 우리는 졌다.

전반 36분 오렌지 군단에 첫골을 허용하기 전까지 우리 선수들은 대등하게
싸웠으나, 첫골을 허용하고 난뒤 우리 선수들은 오렌지 군단의 송곳같은
날카로운 공격에 속수무책으로 급격하게 무너졌다.

무려 다섯골이나 내주는 참담하고 완벽한 패배였다.

수비진영에서의 홍명보의 분전, 골키퍼 김병지의 선방, 후반 교체멤버로
들어가 종횡무진 상대 진영을 휘젓고 다닌 고종수 이동국과 같은 어린
선수들의 두려움없는 공격, 그것이 실력이고, 미래의 가능성이다.

소극적인 수비위주의 전략, 전반적으로 위축된 플레이, 느리고 부정확한
패스, 우리 선수들의 무거운 몸이 패인이다.

미드필드는 오렌지군단에 너무 쉽게 장악당했다.

미드필드를 장악한 그들은 우리 수비진들을 정교한 패스와 빠르고 날카로운
공격으로 따돌리고 우리 골문을 마음껏 농락했다.

그들은 분명히 힘과 전략, 기술과 스피드에서 우리 선수들 보다 완벽하게
앞서 있었다.

시간이 흐를수록 그 차이의 절대성은 분명해졌다.

공격과 수비의 조화, 명쾌한 골결정력은 그들의 것이었고, 졸렬과 수치는
우리의 몫이었다.

분하고 안타깝지만 세계의 벽이 얼마나 높은가를 또 한번 실감할 수밖에
없는 경기였다.

그토록 간절한 월드컵 본선무대에서의 첫승과 16강 진출이라는 꿈은 산산이
깨어졌다.

이제 그 패배를 현실로 받아들여야 한다.

패배에 지나치게 좌절하고 울분을 터뜨리고 있기에는 우리 앞에 너무나
많은 일들이 산적해 있다.

어쩌면 객관적인 전력에서 우리보다 월등하게 앞서 있는 네덜란드 대표팀을
이기리라는 실낱같은 희망은 사실은 우리가 가지고 있는 능력이나 잠재력에
비해 너무나 터무니없이 컸었는지도 모른다.

우리의 꿈과 기대가 컸기 때문에 그만큼 더 실패와 좌절의 아픔은 크다.

지금 우리 현실은 너무나 어렵다.

경제구조 전반의 구조조정, 부실기업 퇴출, 정리해고, 대량실업 사태
등으로 시름깊은 우리 마음을 대표선수들이 승전보로 위로해주기를 기대했다.

그 기대는 이그러지고 말았다.

그래서 생각할수록 아쉬움을 떨쳐버리기가 쉽지 않다.

패배에 대한 깨끗한 승복이 내일의 도약을 위한 첫번째 조건이다.

자, 이제 심호흡을 크게 하고 우리의 패배를 겸허하게, 의연하게
받아들이자.

패배했으나 최선을 다한 우리 선수들과 차범근 감독에게 따뜻한 위로의
말을 건네자. 지금 이 상황에서 책임추궁과 비난의 말은 무용한 것이다.

냄비처럼 펄펄 끓어오르다가 이내 차갑게 식어버리는 얇고 기회주의적인
정신으로는 내일을 약속할 수 없다.

월트 휘트먼은 그의 저 유명한 시집 "풀잎"서문에서 당신의 모든 행위가
당신의 머리 위로 되돌아오는 것처럼 행동하라고 말했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금언이다.

그들은 전용구장 하나 제대로 갖추어지지 않은 열악한 조건속에서도
아시아에 주어진 출전티켓을 거머쥐었고, 세계 무대에 한국인의 혼을
보여주었다.

이제 들떴던 마음을 가라앉히고 평상으로 돌아가야 한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뼈아픈 자성, 그리고 내일을 위한 합리적
준비다.

하면 된다는 몰이성적 구호 속에 잃어버린 하면 되는 것과 안되는 것을
분별할 줄 아는 이성을 되찾아야한다.

빨리빨리라는 구호속에 묻혀버린 내면에의 차분한 응시와 성찰, 삶의 여유와
과정의 소중함을 되찾자.

패배가 주는 실의와 의기소침을 말끔히 털어버리자.이제 2002년이다.

내일을 향해 나아가자.

다시 뛰자.

( 한 국 경 제 신 문 1998년 6월 22일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