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7년 11월21일 오후9시 세종로 정부종합청사.

임창열 재정경제원장관이 긴장된 표정으로 기자회견에 나섰다.

그는 우리나라가 국제통화기금(IMF)에 구제금융을 요청키로 했다는 사실을
전격발표했다.

TV를 지켜보던 국민들은 경악했다.

막강한 인적자산을 앞세워 고도성장을 구가해오던 한국경제가 나락으로
곤두박질치는 순간이었다.

끊임없이 페달을 밟아야만 굴러가는, 이른바 "자전거경제"가 마침내 바퀴를
멈춰야하는 신호이기도 했다.

그러나 한숨을 쉬고있을 겨를이 없었다.

국가부도위기를 맞아 한시라도 빨리 자금지원을 받아야할 판이었다.

자금지원협상의 요체는 한국경제의 자구노력이었다.

돈을 빌려주는 입장에서 보면 당연한 것이기도 했다.

IMF는 11월25일 서울 힐튼호텔에 캠프를 치고 우리 정부와 협상을 벌였다.

고금리구조의 정착을 위한 이자제한법의 폐지등 우리로서는 상상도
할수 없었던 요구들이 쏟아져나왔다.

우여곡절끝에 협상은 타결돼 12월3일 우리나라에 대한 5백70억달러규모의
구제금융계획이 발표됐다.

여기에는 장단기 거시경제운용및 구조조정계획을 골자로 한 이행조건이
포함돼 있었다.

한국경제는 본격적으로 IMF 프로그램속으로 빨려들어갔다.

IMF프로그램은 저성장 고물가기조속에서 극도의 긴축과 내핍을 강요하고
있었다.

부실금융기관의 과감한 폐쇄와 한계기업의 퇴출도 유난히 강조됐다.

그리고 얼마후 12월8일에는 세계은행(IBRD)관계자들이 서울에 도착했다.

우리나라에 대한 경제재건차관(ERL)제공을 위한 협상때문이었다.

IBRD는 이미 우리나라에 1백억달러의 자금을 빌려주기로 IMF를 통해
약속해둔 상태였다.

그러나 IBRD는 30억달러만 ERL로 제공하고 나머지 70억달러는 구조조정차관
(SAL)으로 빌려주기로 했다.

구조조정차관의 비중이 높아진 이유는 IBRD의 기능때문이었다.

IBRD는 본래 개발도상국의 경제개발을 지원하기위해 각종 프로젝트차관을
제공하거나 구조조정차관을 제공하는데 주안을 두고있었다.

특히 구조조정과정에서 소외되는 약자계층, 특히 실직자 구제에 관심이
많았다.

IMF프로그램이 거시적인 배경에서 자금지원과 구조조정을 병행하고있다면
IBRD프로그램은 미시적인 측면에서 구조조정을 안내하고 그 후유증을
치유하는 성격을 띠고있는 셈이다.

이처럼 상호보완적인 기능때문에 구제금융 대상국가에는 IMF와 IBRD의
자금이 동시에 투입돼왔다.

우리나라를 비롯해 태국과 인도네시아도 양기관으로부터 지원을 받았다.

작년 8월말에 IMF등으로부터 1백72억달러의 구제금융자금을 지원받은
태국의 경우 IBRD로부터 15억달러의 구조조정자금을 챙겼다.

금융개혁과 관련된 기술지도도 이뤄졌다.

인도네시아는 IBRD로부터 45억달러의 구조조정자금을 받았다.

이 자금은 빈곤자와 실업자들을 위한 사회안전망구축에 사용토록 합의됐다.

IBRD는 지난 3월 우리나라에도 실직자구제와 중소기업지원자금으로
20억달러를 빌려줬었다.

지금도 우리 정부는 금융및 기업구조조정에 드는 비용을 마련하기위해
50억달러의 추가지원협상을 벌이고있다.

IMF와 IBRD의 연계구제금융은 앞으로 보다 활발하게 전개될 것으로
보인다.

구조조정과 관련된 노하우가 독보적인데다 최근 동남아를 중심으로
집중지원을 해오는 과정에서 정책의 우선순위를 가려내는 감각도 탁월하다는
평이다.

양자는 건전한 상호비판도 아끼지않고 있다.

IBRD가 IMF의 일방적인 고금리정책을 경계해온 것도 비슷한 맥락이다.

어쨌든 양 국제기구는 앞으로 더 바빠질 것 같다.

세계 11대 교역대국인 우리나라까지 구제금융을 받음으로써 세계금융
시장에서의 위상도 상대적으로 강화된 상태다.

게다가 동남아에서 시작된 외환위기가 최근에는 일본 중국으로까지
북상, 일거리(?)가 더 늘어날지도 모른다.

양기구에서 증자논의가 활발하게 이뤄지고있는 이유도 이같은
배경때문이다.

IMF와 IBRD가 "미국 재무부의 입김"으로 움직인다는 비판도 있기는
하다.

그렇지만 이들이 세계금융시장의 평화유지군역할을 톡톡히 해내고있는
것 또한 틀림없는 사실이다.

< 조일훈 기자 / jih@ >

( 한 국 경 제 신 문 1998년 5월 11일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