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외환-금융위기가 벼랑끝을 탈출하기가 무섭게 기다렸다는 듯
미국의 통상압력이 밀려들기 시작했다.

원화의 환율상승으로 수출이 호전되고 경제난 극복을 위한 소비절약운동이
큰 성과를 보이자 미국 정부와 업계가 이에 대해 시비를 걸고나선 것이다.

최근 마이크로테크놀러지 등 미국 반도체업계는 한국반도체회사들이
덤핑수출 공세를 펴고있다며 미 의회 등에 이를 문제삼도록 하겠다고 밝혔다.

또 미국 의약업협회는 한국정부가 수입의약품에 대해 차별대우를 한다며
한국을 스페셜 301조의 우선 감시대상국으로 지정토록 미 무역대표부(USTR)에
요청했다고 한다.

덤핑시비는 자동차 전자 등의 분야로 확대되고 있는 양상이다.

특히 주목되는 것은 한동안 잠잠하던 미국 정부까지도 최근 한국에 대한
통상압력에 가세하고 있다는 것이다.

얼마전 한국을 방문했던 빌 데일리 상무장관은 한국의 근검절약운동이
수입반대 외제반대 양상을 띨 경우 미 의회 등으로 부터 강력한 행동이
나오게 될 것임을 경고했다.

미국의 이같은 압력은 이달말로 예정된 USTR의 국가별 무역장벽보고서
발표를 앞둔 시점이어서 한-미 무역마찰이 또다시 본격적으로 재연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우려를 금치 못하게 한다.

미국의 새로운 통상공세는 한국의 경제위기를 틈타 미국기업들과
경쟁관계에 있는 한국기업들의 손발을 묶어놓자는 것으로 볼수 있다.

특히 IMF의 자금지원을 한국 반도체산업의 구조조정과 연계시켜야 한다는
미국 반도체업계의 주장은 악의적이기까지 하다.

발등의 불을 끄기 위한 IMF의 긴급 지원자금이 특정산업을 위한
투자재원으로 사용될 여지가 없음은 미국 업계가 더 잘 알고 있을 것이다.

한국의 소비자들은 지금 실업급증과 소득감소에 따라 구매력이 떨어져
불요불급한 소비를 줄이고 있을 뿐이지 외국상품을 배격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과거의 무분별한 소비행태에 대한 소비자 스스로의 각성조차 시비거리가
될수는 없는 일이다.

한국이 아직 심각한 경제위기를 벗어나지 못한 시점에서 미국이 무리하게
시장개방 확대를 강요하고 한국으로부터의 수입을 규제하려 한다면 이는
결국 자국의 이익에도 배치되는 근시안적 발상이라고 하지 않을수 없다.

비록 우리나라는 경제위기를 겪고 있지만 시장경제와 자유무역에 대한
의지만은 확고하며 IMF체제가 들어서면서 시장개방이 더욱 과감하게
추진되고 있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그런데도 미국을 비롯한 주요 무역파트너들이 최근 우리나라에 대해
통상압력을 강화하고 있는 데는 우리측이 그 빌미를 제공한 감도 없지 않다.

근검절약운동 그 자체는 바람직한 것이지만 너무 호들갑스럽고 극단적으로
흘러 "수출은 선이고 수입은 악"이라는 시대착오적 발상이 교역상대국들을
자극하지 않았나 되돌아 볼 일이다.

부당한 통상압력에 대해서는 민관이 협력해 단호히 대처해야 하지만
불필요하게 오해를 살만한 언행은 삼가는 것이 좋다.

한국이라면 "불공정무역을 일삼는 나라"라는 외국의 굴절된 인식을
바로잡는 일이 새 통상정책의 출발점이 돼야 한다.

(한국경제신문 1998년 3월 3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