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 기업들의 지배구조는 참으로 괴이하다.

당연히 책임을 져야할 사람들이 책임을 지지 않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다.

반면 은행의 경우 책임을 질 수 없는 사람으로 하여금 책임을 지게 하는
지배구조까지 용인되고 있다.

주식회사의 주인은 주주이고, 주인은 경영에 대해 최종적인 책임을 진다.

대기업의 경우 지배주주는 기조실이나 비서실 등을 통해 계열기업에 대한
지배권을 행사하면서도 법적으로는 아무런 책임을 지지 않고 있다.

은행도 주주가 아닌 사람이 사실상 지배권을 행사하면서도 경영부실로 인한
책임은 주주가 지도록 하고 있다.

이번 제일은행이나 서울은행의 경우가 그 단적인 예다.

은행의 지배구조 개혁도 이에 못지 않게 중요한 일이다.

은행장 인사에 대해 외부의 간여를 배제하는 것은 그중에서도 대표적인
일이다.

그러나 이것만으로는 부족하다.

경우에 따라서는 지배권의 공백 상태에서 혼란을 더욱 가중시킬 수도
있기 때문이다.

과거에는 은행의 주인행세를 주주가 아닌 정부나 정치권이 해왔다.

은행주식을 한주도 가지고 있지 않은 사람들이 주인노릇을 하고, 정작
주주들의 권한 행사는 철저하게 배제됐다.

산업자본의 은행지배를 막아야 한다는 것이 이유다.

그러나 이는 표면적인 이유일 뿐이고 실제로는 권력을 가진자가 권력유지를
위한 도구로 은행을 이용하려 했기 때문이다.

흔히 말하는 관치금융이고 정치금융이다.

주주에게 지배권을 주지 않기 위해 온갖 꾀를 다부렸다.

세계에서 유례가 없는 주식취득 금지제도를 도입하여 은행주식의 동일인
소유한도를 4%로 제한하는가 하면 이것도 부족하여 산업자본의 경우 비록
주식을 소유하고 있다 하더라도 이사회 참여를 금지하거나 의결권행사를
제한하는 등 주주평등권을 침해하고 있다.

주식회사인 은행의 최고기구인 주주총회와 이사회는 크리스마스트리와
같은 장식품에 불과하다.

은행의 모든 권한은 은행장에게 집중되어 있고,은행의 상임 이사들은
사실상 은행장이 임명하는, 부장보다 높은 직원일 뿐이다.

은행의 비상임이사들은 주주대표와 이사회추천 이사로 구성되어 있다.

그러나 주주대표는 소액주주로만 구성돼 있어 주주를 대표한다고 말할
수가 없다.

현재 시중은행 비상임이사들의 지분율은 전체 주식의 3%에도 못미친다.

비상임이사는 은행장이 추천하개 되어 있다.

이에 따라 이사회구성원의 70%이상을 은행장이 장악하고 있다.

따라서 은행장 한사람만 좌지우지할수 있으면 은행을 완전하게 지배할수
있으며, 바로 이것 때문에 과거 권력자들이 그토록 은행장 선임에
간여하려고 했던 것이다.

이제 은행의 지배구조도 바꾸어야 한다.

먼저 은행의 최고 의사결정기구는 명실공히 주주총회의 수탁을 받은
이사회여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이사회의 구성원을 철저하게 주주의 지분율 기준으로
해야 한다.

산업자본의 지배를 배제해야 한다는 논리로 대주주의 이사회 참여를
배제하는 것은 이제 외국인에게 1백%까지 국내은행 주식취득을 허용하는
마당에 그 명분이 없어졌다.

또 은행장에게 집중돼 있는 권한을 분산시켜야 한다.

현재 은행장은 이사회의장을 겸임하고 감사선임에도 절대적인 영향력을
행사하면서 사실상 3권을 갖고 있다.

감사는 상법상 이사의 불법행위에 대한 조사와 시정요구권을 갖는
대표이사 다음의 서열임에도 불구하고,현실적인 권한은 상임이사보다 못하다.

이런 의미에서 이사회의 의장을 맡는 회장과 은행장을 분리하는 것도
고려해 볼만하다.

과거와 같이 단순히 물러나는 행장에 대한 예우적인 차원이 아닌
3권분립하의 입법부 수장과 같은 권한을 가진 이사회 의장이어야 한다.

이사회 의장과 은행장의 겸임여부에 대해서는 양론이 있다.

양자를 분리해야 한다는 논리는 양자를 겸임시킬 경우 은행장에게 집행과
평가에 이르는 모든 권한이 집중되어 이사회기능을 유명무실하게 할 우려가
있다는 것이고, 양자를 겸임시켜야 한다는 논리는 집행및 평가에 대한
일관성을 갖게 하고 양자간 대립에 따른 리더십의 혼란을 막자는 것이다.

독일은 외부이사들로만 구성되는 감독이사회가 이사회인 만큼 이사회
의장과 은행장은 당연히 분리되어 있다.

미국의 경우 겸임이 많은 편이고, 영국은 분리가 많다.

특히 영국의 경우 상임이사들간의 권한배분이 잘되어 있어, 은행장은
대외적으로 은행을 대표한다는 것을 제외하고는 여타 상임이사들과 같이
자기가 맡은 분야에 대해서만 책임을 분담할 뿐이다.

금융개혁 과정에서 인수-합병은 불가피한 현상이다.

어려움을 겪고 있는 종금과 은행들이 짝짓기하는 일도 많이 일어날 수도
있고, 또 그렇게 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본다.

그렇다면 합병되는 양기관 최고경영자들간의 역할분담을 위해서도 이사회
의장을 맡는 회장제를 고려해보는 것은 의미있는 일이다.

(한국경제신문 1998년 2월 16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