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행창구가 얼어붙어 경제활동이 마비될 지경이라는 빗발치는 여론에도
불구하고 은행들이 작심한듯 꿈쩍도 않자 어제는 마침내 김대중 대통령
당선자까지 시중은행장들을 만나 기업대출을 촉구하고 나섰다.

원칙적으로는 대출여부는 은행들이 자율적으로 알아서 할 일이고 정부가
개입해서는 안되지만 지금은 금융시장이 마비된 특수한 상황인 만큼 적어도
신용경색을 풀기 위한 정부개입은 불가피하다고 본다.

돈을 못구해 공장의 기계들이 먼지를 뒤집어 쓴채 서있는가 하면 멀쩡한
기업들이 부도를 내고 쓰러지는 기막힌 현실을 더이상 방치할수 없다는
절박한 심정에서 앞뒤를 가릴 여유가 없다고 보기 때문이다.

신용경색으로 인한 부작용은 한 둘이 아니지만 흑자도산 이외에 원자재
수급차질로 인한 생산 및 수출위축도 심각한 실정이다.

통상산업부가 지난 8일 대통령직 인수위원회에 보고한 자료에 따르면 주요
수입원자재의 재고현황은 각각 원유및 석유제품 52일분, 나프타 14일분,
프로판 17일분, LNG 13일분, 고철 10일분, 원당 18일분 등에 불과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대로 가면 원자재재고가 바닥나 생산감소 수출위축 실업증가 물가상승
등과 같은 부작용을 피할수 없을 것으로 예상된다.

우리는 사태가 이정도로까지 심각해진 직접적인 원인은 우선 나부터
살고 봐야겠다는 집단이기주의및 정책당국에 대한 불신 때문이라고 본다.

지난 수십년동안 관치금융에 길들여진 은행들이 앞으로 홀로서기를 하려면
고객확보가 필수적이지만 오는 3월말까지 BIS비율을 8%이상으로 올려야
살아남을수 있다는 생각때문에 마구잡이로 대출을 회수하고 있다.

게다가 지난해말 IMF 긴급자금지원을 받는 과정에서 부실 종금사들에 대한
미숙한 처리로 정책당국에 대한 불신이 쌓인 탓도 크다.

따라서 지금의 신용경색을 풀기 위해서는 우선 정부에 대한 신뢰를
회복해야 한다.

예를 들어 금융산업 구조조정에 관한 객관적이고 명확한 기준을 서둘러
밝힐 필요가 있다.

만일 은행들의 생사가 BIS비율로 판가름난다면 IMF와 협의해 BIS비율을
산정하는 기준시점을 늦추거나 정부가 나서서 BIS비율을 높이도록 지원해야
할 것이다.

정부는 이미 지난해말에 후순위채권을 매입해 은행들의 BIS비율을 높여준바
있으며 같은 맥락에서 어제 김대중당선자가 필요한 경우 추가적인 후순위채권
매입을 약속한 것은 시의적절하다고 본다.

은행들의 대출활성화를 유도하기 위해 필요한 또한가지 일은 통화관리를
탄력적으로 하는 것이다.

가뜩이나 분위기가 움츠러든 판에 유동성공급까지 크게 줄이면 대출증대와
금리인하를 유도하는데 찬물을 끼얹기 때문이다.

따라서 IMF와 약정한 9%의 통화증가율을 3월말 기준으로 13~14%까지
상향조정한 것은 매우 시의적절한 일로 환영한다.

대출활성화를 유도하기 위한 이같은 여건조성에도 불구하고 대출노력을
하지 않는 은행들에 대해서는 자금중개기능을 포기했다고 보고 이에 상응하는
불이익을 줄수도 있다고 본다.

(한국경제신문 1998년 1월 10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