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춘호 <대한출판문화협회장>

거품은 경제의 문제만은 아니다.

세계 11번째의 무역량 규모를 가진 경제 대국, OECD에 가입한 선진국,
1만달러의 국민 소득국 등의 자화자찬이 불러온 것은 결국 경제 파산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거품이 경제에만 있었던가.

정치 사회 교육 문화 등 각계를 과대 포장하고 있는 거품도 경제 파탄으로
그 실상이 드러나고 있지 않은가.

정치계의 거품은 그 속을 들여다보면 그것이 민주정치를 내세우고 있지만,
지역패권주의와 비민주적인 1인 중심의 사랑방 정치에 다름아니다.

또한 사회는 한탕주의에다 과소비가 판치는 배금주의로 얼룩져있으며,
세계 최고의 교육열을 자랑하는 것도 기실 사교육비로 충당되는 기형적인
양상을 보이고 있을 뿐이다.

문화도 소리 소문 없이 이미 주권을 잃고 외색 물결에 휩쓸리고 있는 것이
작금의 현실이다.

이는 전적으로 우리 국민이 "생각하는 백성이라야 산다"고 일찍이 주창한
뜻있는 이들의 말을 경시한 까닭이다.

예를 들면 국회의원들이 사우나실을 만들어 육체의 휴식을 도모하면서도
국회도서관의 도서 구입을 통한 연구자료 확보에는 무신경인 것만 보아도
알수 있는 일이다.

마음의 양식이자 나라의 건전성을 지탱하며, 나아가 고부가가치 산업인
문화 경쟁시대의 첨병인 출판산업을 경시한 결과는 이처럼 무섭다.

거품, 즉 허세로 인한 우리의 파탄은 어느 정도 예견된 일이었다.

어렵게 탄생한 문화부가 문화체육부로 바뀌면서 진정 알맹이어야 할
문화가 체육의 들러리로, 장식품으로 전락한 것부터가 문제의 시작이었다.

그러므로 우리 출판계는 문화부의 독립을 강력히 원한다.

문화부의 독립으로 아사 상태에 빠진 국민의 문화주권을 바로 세울 정책과
투자를 일관성있고도 지속적으로 펼쳐나가야 할 것이다.

독립된 문화부가 최우선으로 선결해야 할 과제로는 첫째 문화 주권회복을
위한 획기적인 독서(출판)진흥책을 실시하는 일이다.

이는 출판계에 국한된 해법이 아니라, 결국 인적 자원의 개발로 난국을
타개할 수밖에 없는 우리에 대한 성찰에 기인한 것이다.

우리 출판계는 올해 출협 창립 50주년을 맞아 기념 사업의 일환으로
"가족과 함께 책방가는 날"을 제정하여 각계 각층의 호응을 받고 있다.

이것은 가정의 대화 부재로 인해 비행 청소년 문제가 날로 심각해지고
있는 세태를 책으로 가교를 놓아 화목한 가정을 이끌고, 나아가 건강한
사회 조성에도 이바지하고자 함이다.

그러나 이러한 캠페인성 운동만으로는 국민의 정신 고취와 교양 함양을
이끌어 내기가 턱없이 미흡하다.

이를테면 공공 도서관의 장서 수가 중국만도 못한 현실을 직시하고 그에
따른 처방을 내리는 등 국가 차원의 독서 기반 구축이 병행되어야 실효를
거둘 수 있기 때문이다.

둘째로는 출판 유통 구조의 현대화를 위한 적극적인 협조로 유통시장
개방과 부도 회오리에 휘말린 출판계 전체의 생존권을 사수하여야 한다는
점이다.

우리 협회는 신년도 중점 사업중의 하나로 그동안 준비해온 전산화를
시행토록하여 유통 현대화는 물론 효율적인 경영과 독자들에게 신속 정확한
양질의 서비스를 제공하고자 한다.

셋째로는 우리 출판물의 해외 진출을 위한 지원과 문화 기간산업인 출판
육성을 위해 우선 출판사및 인쇄소 등록법을 출판과 인쇄를 분리하고 출판은
출판진흥법으로 고쳐야 한다.

그리고 문화 무한경쟁 시대의 도래에 따른 문화 인프라구축을 단행해야
할 것이다.

이것이야 말로 그간 정부가 출판을 포함한 문화 육성이 중요하다고 장밋빛
청사진을 제시해온 일의 시작이 될 것이다.

지금 우리에게 절실한 것은, 그리고 국난을 타개할 유일한 힘은
애국심이다.

진정한 애국심은 어려운 때일수록 진가를 발휘해 왔고 발휘한다.

그 애국심의 근본은 건전한 정신과 내일을 준비하는 것, 즉 책의 힘이라고
믿는다.

책을 펴면 미래로 가는 길이 보이기 때문이다.


(한국경제신문 1997년 12월 27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