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금융계를 벼랑 끝에서 떠받쳐 준 일등 공신은 누구인가"

한국의 외환-금융위기가 한 고비를 넘기면서 월가에 진출한 한국계
금융기관 사이에서는 외국 은행들에 대한 "재평가 작업"이 한창이다.

대체적인 평가는 "일본-유럽계 은행들은 최소한의 의리를 지켰고, 미국계
은행들은 완전히 안면을 바꾸더라"는 쪽으로 모아진다.

한국의 국가 신용등급이 연일 추락하자 대부분의 미국계 은행들은 서둘러
대출금을 회수하기에 바빴던게 사실이다.

하지만 미국계 금융기관들 중에서 시티은행 만큼은 다른 평가를 받고 있다.

"곤경에 처했을 때 끝까지 의리를 지켜 준 유일한 은행"이라는게 이곳
한국계 금융관계자들의 한결같은 얘기다.

이달 중순을 고비로 다른 미국계 은행들이 앞다퉈 한국과의 거래를 중단한
이후에도 시티은행은 미국 유일의 버팀목 역할을 해줬다.

"불가피하게" 대출금을 회수한 제일.서울은행 등을 제외한 대부분의 한국계
은행들에 대해 계속 라인을 유지해 온 것.

시티은행의 "진가"가 발휘된 때는 무디스에 이어 스탠더드앤드푸어스마저
한국의 국가 신용등급을 베트남 등과 같은 "정크 상태"로 깎아 내렸던 지난
22일.

아시아 총괄본부가 있는 홍콩을 중심으로 뉴욕 본점의 코리아 데스크와
서울 지점 핵심 관계자들간에 밤늦게까지 전화 컨퍼런스를 가지면서 "대책"
을 논의했다.

이 컨퍼런스에 참여했던 한 관계자는 "쉽게 결론이 나지 않았다. 그러나
한국의 펀더멘틀즈를 믿고 좀더 버텨보자는 쪽으로 회의를 마무리지었다"고
말했다.

시티은행의 이같은 결정은 벼랑 끝에서 마침내 추락하는 듯 했던 한국에
대한 국제 금융계의 신인도를 최소한이나마 지켜 주는 역할을 했다.

시티은행은 이어 미국 내외의 금융기관들을 규합해 새해초 한국에 30억달러
의 신디케이션 론을 제공키로 하는 프로젝트를 마련했다.

한마디로 "한국 버텨주기"에 총대를 메고 나선 셈이다.

시티은행은 각종 정보망을 가동한 결과 한달여 전부터 이미 한국이 대통령
선거를 고비로 위기관리 능력을 충분히 갖출 수 있을 것이라는 결론을
내렸다는 것.

무디스나 스탠더드앤드푸어스 같은 신용조사기관의 대폭적인 등급 하향조정
에 대해서도 흔들리지 않았다.

"지금 상황에서는 신용등급이 어떻건 의미가 없다. 미국은 소송(sue)사회다.
신용조사기관은 언제나 최악의 경우를 상정하고 드급을 매긴다. 한국에
투자했다가 낭패를 본 투자자들로부터 소송을 당하지 않으려는 계산도 깔려
있는 것 아니겠는가"라는게 시티은행 관계자의 분석이다.

시티은행측은 한국계 금융기관들에 대해 대출을 지속한 것은 나름의
"계산된 리스크"에 근거한 것이라고도 설명한다.

"현지 사회에 파고드는 은행(embedded bank)"을 표방하고 있는 이 은행은
한국 지점을 유능한 한국인들 위주로 운영하고 있어 그때그때 정확한
정보망을 가동할 수 있다는 것.

실제로 시티은행은 92년 14대 대통령선거 이후 현대그룹이 정부로부터
금융제재를 받고 있었을 당시 스위스유니온뱅크와 더불어 기존 대출라인을
그대로 유지한 것은 물론 신규 대출까지 대폭 늘리는 등의 공격적인 영업
전략을 구사했다.

정확한 정보를 바탕으로 "어떤 경우에도 현대는 살아남을 것"이라는 판단이
섰기 때문이었다고 한다.

< 뉴욕=이학영 특파원 >

(한국경제신문 1997년 12월 27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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