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경제의 명실상부한 시장중심체제로의 전환은 무한경쟁시대의 도래에
따라 선택의 여지가 없는 당위가 돼버린지 오래다.

여기에 더하여 IMF는 시장경제체제의 확충을 자금지원조건으로 제시하였고,
대통령 당선자도 "민주적 시장경제론"을 바탕으로 경제의 틀을 다시 짤
것으로 예상된다.

이에따라 지난달 우리 경제의 성장 주역이었음에도 오늘의 경제위기를
초래한 원인의 하나로 지목되고 있는 재벌체제도 변혁의 과정을 겪게 될
공산이 커졌다.

과거의 재벌정책은 대부분 대증요법에 지나지 않았고 시장경제원칙에도
위배될 뿐 아니라 그 효과도 미미했다.

시장경제와 합치되는 재벌정책은 경제주체들간의 이해상충에 따라 발생할수
있는, 시장질서의 붕괴를 방지하기 위한 공정하고 투명한 경기규칙의 제정과
이의 집행에 그쳐야 한다.

사실 재벌만을 대상으로 한 정책은 기본적으로 시장경제원칙에 위배될수
밖에 없기 때문에 재벌문제는 재벌정책이 아닌 기업정책으로 접근해야 하며
기업정책이란 것도 시장질서 유지를 위한 경기규칙의 테두리를 벗어나지
않아야 한다.

정부가 과거 재벌정책의 일환으로 추진한 소유분산은 기아그룹 사례에서
보듯이 경영자와 종업원 등 기업내부자와 주주간의 이해상충을 심화시킬
수도 있다.

소유구조는 시장에서 결정되도록 해야 하며 이 경우에만 가장 효율적인
소유구조가 형성된다.

경영자가 주주 권익을 침해하기 쉬운 여건과 업종에서는 소유집중현상이
나타나며, 그렇지 않은 경우에는 위험회피를 위한 소유분산이 일반화될
것이다.

재벌계열사에 대한 출자제한은 신축적인 경영전략 추구를 저해한다.

투자기회가 발생했는데도 투자를 억제하라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또한 이 규제가 M&A활동을 억제함으로써 우리 경제의 구조조정에 커다란
장애가 되고 있음은 최근의 경제위기에서도 분명하게 드러났다.

정부는 최근 부실기업 인수의 경우에는 출자제한을 유예하기로 했지만
이런 땜질식 정책은 이제 그만 둬야 할 때가 됐다.

상호지급보증이나 내부거래도 공정한 대가 또는 시장가격을 수수하면서
이루어진다면 정부가 이를 금지할 명분은 없다.

상호지급보증이나 내부거래가 재벌그룹내에서 만연하고 그것이 문제가 되는
근본 이유는 이들 거래가 공정한 가격으로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는 데 있다.

그러면 재벌의 폐해로 지적되는 경제력집중, 선단식 경영, 과잉투자,
내부거래, 상호지급보증 그리고 심지어는 비자금 조성이나 대주주와 기업간의
불공정 거래를 억제할수 있고 시장경제원칙에도 부합하는 기업정책은
무엇인가.

재벌 폐해는 모두 대주주 경영자가 작은 지분만을 소유하면서도 경영권을
독점하고 전횡할수 있으며 그 과정에서 일부주주들의 권익침해가 용인되는
부실한 지배구조에서 연유한다.

대주주경영자에 대한 외부주주들의 견제와 감시가 가능한 "민주적
지배구조"하에서는 이러한 폐해는 존재하기 어렵다.

재벌의 상장계열사들은 법적으로 상호독립된 조직일뿐 아니라 대주주를
제외하면 주주 구성도 다르다.

따라서 각 계열사의 이사회가 당해기업 주주들의 이익을 대변하도록
구성되고 최고경영자로부터의 독립성을 유지하게 된다면 계열사들의
독립경영이 가능해진다.

이렇게 되면 부실계열사에는 이익이 되지만 우량계열사에는 손실이 되는
계열사간 상호지급보증, 상호보조, 부당 내부거래 관행은 사라질 것이다.

예컨대 부실계열사에 지급보증을 해주고 손실을 입은 우량계열사의
이사들이 당해기업 주주들의 청구에 따라 손해배상 책임을 지게 되면
그 이사회는 정당한 대가를 받지 않고는 계열사에 대한 지급보증을 승인하지
않을 것이다.

주주들이 원치 않는 사업에 대한 출자나 적자계열사에 대한 보조에도
제동이 걸릴 것이다.

대주주 독단으로 잉여 현금흐름을 가진 계열사들의 자금을 모아
성공가능성이 희박한 사업에 쏟아붓는 재벌은 발견하기 어렵게 될 것이다.

상호지급보증이나 상호보조가 불가능하게 되면 부실계열사의 퇴출도
용이해진다.

요컨대 재벌문제는 이사회 기능의 개선과 이사들의 책임강화에 의해
해소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지배구조의 개선을 위해서는 모든 상장희망 기업에 대해 독일 미국
등 선진국에서와 같이 지배구조에 관한 일정한 의무를 부과하여 경영자와
외부주주간의 이해상충을 방지해야 한다.

또한 이사들에 대한 주주대표 소송요건을 완화하고 기관투자가 등
외부주주들의 의결권행사에 대한 제약을 풀어 이를 활성화해야 한다.

이러한 제도들은 재벌만이 아니라 다수의 외부주주들이 존재하는 모든
상장기업을 대상으로 하는 것일 뿐 아니라 시장경제의 원활한 작동을 위해서
기업 이해관계자들이 지켜야 할 경기규칙에 지나지 않는다는 점을 인식해야
한다.


(한국경제신문 1997년 12월 23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