칠십평생 이렇게 행복한 적이 없었다고 할 만큼 그 밤은 그를 새로운
희망에 부풀게했다.

돈이 좋기는 정말 좋은 거다.

그러나 앙큼하게 자기 잇속을 따지기 시작한 미화는 볼링점수 200이
넘는 영감님의 힘이 일회전에서 깨끗이 넉다운 되자 제이슨을 닮은 영수를
다시 생각해본다.

학벌도 별로 없고 직업도 신통치 않다고 군대에 가자마자 퇴짜를 놓은
영수가 새삼 그립다.

그렇다면 영수가 제대할 때까지만 김치수 회장과 지내면서 한재산 모아
그와 우동가게라도 하면서 살면 어떨까.

어쨌든 재수 좋게 재벌 총수하고 알게 되었으니 그 끈을 꼭 붙들고
전문대학에 다니면서 돈을 모으는 거다.

그녀는 김치수와 하룻밤을 지내고 나서 더욱 그에게 나긋나긋해졌다.

그녀가 그렇게 하면 할수록 김치수는 순한 양처럼 말을 잘 듣는다.

그녀가 제일 열심히 받들어 모시는 것은 키스를 잘 퍼부어주는 것이다.

그는 실제로 일주일에 한번씩 밖에 동침을 원하지도 않았고 밤을 새우는
일은 아주 없어졌다.

그녀는 일주일 후에 30평짜리 아파트로 이사를 했고 근무하던 슈퍼는
그만두었다.

그리고 어느새 김치수보다 더 높은 점수를 따는 볼링선수가 됐고 골프도
배우러 따라다녔다.

자기가 너무나 재수 좋은 여자라고 생각하며 날아갈듯 들떴다.

그리고 은근슬쩍 제대 후에 다시 만나자고 영수에게 편지를 띄우기도
했다.

남자라고 다 힘이 좋은게 아니고 영수같이 대단한 남자도 드물다는 자각
아래 그가 제대하는 2년후까지는 죽었소 하고 김치수에게 충성을 다 할 것을
맹세하면서 지낸다.

미화가 얼마나 약아빠진 애 인지 영신에게 까지도 온갖 충성을 다 바쳤다.

김치수는 좋은 처녀아이를 소개했다는 감사의 뜻으로 김은자에게
크리스마스 선물로 일금 3백만원을 보냈다.

"아버지, 이건 선물이라기에는 너무 뇌물 냄새가 나요. 아무리 미화가
마음에 들더라도 그렇게 과용을 하셔요?"

"그건 내 마음이다. 은자는 너의 친구이기도 하고. 너는 결혼 날짜를
어느 날로 잡을 작정이냐?"

오랜만에 아버지가 정색을 하고 묻는다.

"아버지도 사랑을 해보시니까 헤어진다는 것이 만남보다 더 어렵다는 것을
아실 것도 같은데요"

영신이 상냥하게 웃으면서 말한다.

"피아니스트가 그렇게 오래 기다려 줄 것 같냐?"

"그것은 아버지 하기에 달렸어요. 아무튼 금년엔 안 되고 신년들어 할
게요"

"공 치는 친구가 안 놓아주냐?"

"아뇨. 그런 것 보다 말썽없이 하려면 그가 시합을 하러 미국
페블비치대회에 가는 1월말이 좋을 것 같아서요"

(한국경제신문 1997년 12월 15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