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한국당의 경선불복이 있었을 때, 이제 초등학교 반장 선거에서도
낙선자가 불복하는 경우가 생길 것이라는, 우스개 반 우려 반의 목소리가
있었다.

이런 우스개와 우려는 당장에 웃지 못할 현실로 나타났다.

강남의 G중학교 1학년 X반에서 지난 10월에 실제로 있었던 일이다.

가을 체육대회 준비로 학생들은 방과후에도 힘들게 연습을 해야 했는데,
이럴 경우 반장어머니들이 마실 것과 간식을 준비하는 것이 일반적인 관례로
되어 있다.

그런데 이 학급의 반장어머니는 전혀 간식을 준비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학생들의 불만이 뒤따랐을 것이라는 상상은 쉽사리 할수 있다.

그러나 문제가 심각하게 된 것은 담임 선생님이 학생들을 향해 반장을
다시 뽑자고 공식적으로 선언하고 나선 것이다.

반장에게 불만을 갖고있던 학생들마저 경악할 만한 담임선생님의
반응이었다.

선생님은 반장어머니에게 전화를 걸어 사정을 설명하고 협조를 구할수
있었을 것이다.

만일 그 어머니가 협조를 거부했다면, 학급 회의에서 따로 방안을 마련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학급의 임원단에게 공동으로 간식을 마련토록 하라거나, 아니면 회비를
걷어 음료수를 사마시자는 등 최선은 아니더라도 방법은 여럿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담임 선생님은 민주적인 해결방법을 귀찮게 여겼음인지, 아니면
알아서 기지 못한 반장이 괘씸했던지, 참으로 비교육적인 방법을 택했던
것이다.

"반장은 사퇴하라. 반장 선거 다시 하자"

어쩌면 정치판에서 일어난 일과 이다지 똑같을 수 있을까.

정치문제, 좁게는 정당의 문제는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쉬운 일을 쉽게 풀라고 많은 세비를 주며 국회의원을 뽑지는 않는다.

대통령 후보를 선출하는 일이며, 정책을 제시하고, 국정에 참여하는
모든 정치권의 일들은 매우 중요하며, 따라서 당연히 풀기 어려운 일들이다.

하지만 정치하는 사람들은 밤새워 고민하고 노력하기보다는 자기들 좋을
대로 쉬운 쪽을 택해 헐뜯고 분열하고 탈당하고, 이합집산을 거듭한다.

물은 위에서 아래로 흐르는 법이라서, 정치권의 일인줄 알았던 것이
학교에까지 흘러들어왔으니 이 일을 어찌하랴.

경선불복의 당사자는 TV토론에서 반장선거는 예선이지 본선이 아니라고
자못 당당하게 나왔으나, 실제 이런 일이 있을줄 그 자신도, 다른
정치인들도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았을 것이다.

학부모 입장에 있는 필자로서는 멀리 있는 정치가보다는 선생님에게
유감이 더 많다.

정치가 그렇고, 다른 모든 직업이 그렇고, 인생이 그렇듯 선생님의
길도 쉽게만 걸어서는 안된다.

자신의 한마디가 학생들에게 어떤 영향을 주리라는 것을 생각했어야
하지 않을까.

정치판이야 어떻든 교육자로서 올바로 판단하고 행동하는 의식이 있었다면
뽑은지 한달 밖에 안된 반장을 다시 뽑자는 망언은 하지 않았을 것이다.

다시 뽑자, 아니다 물러날수 없다고 시끌벅적하던 G중학교 1학년 X반에서는
그러나 반장선거를 다시 하지 않았다.

반장 어머니가 부랴부랴 간식을 마련해 와서인지, 아니면 강력히
항의해서인지는 모르겠다.

어쨌든 이런 과정에서 반장은 학급 구성원들의 의견을 충분히 들었고,
어떤면으로는 자기를 뽑아준 친구들과 타협을 했을 것이다.

그리고 정해진 기간 동안 반장자리를 지킬 자기의 권리도 당당히 행사한
것이다.

머쓱해진 사람은 교사라는 이름의 권한으로 정해진 규칙을 흔들어 놓았던
담임선생님 뿐이었다.

이래서 선거는 재미있다.

선거는 필요하다.

담임선생님의 사주에도 불구하고 한번 정한 반장을 바꾸지 않은 이 어린
학생들이 유권자가 되는날 선거는 더 멋있어질 것이다.


(한국경제신문 1997년 12월 13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