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일 오전 9시.

서울 외환시장에서 "큰 손"으로 불리며 리딩뱅크(선도은행) 역할을 해온
D은행의 외환 딜링룸.

시장이 문을 열기까지 남은 시간은 아직 30분.

평상시라면 자판기 커피잔이라도 들고 여유를 부릴만한 시간.

그렇지만 이날의 딜링룸 분위기는 무척 달랐다.

사뭇 비장감마저도 들게 하는 무거운 공기가 깔렀다.

하나같이 전화통에 매달려 있는 딜러들의 모습에서 무언가 심상치 않은
상황임을 알수 있다.

이 은행의 딜링업무를 실무 총괄하는 M대리.

10년 가까운 은행원 경력은 모두 원.달러 거래.

시장흐름을 읽는 눈도 뛰어나다고 자타가 공인하는 베테랑이다.

그런데 개장시간이 다가올 수록 M대리의 얼굴에 불안한 기색이 진해졌다.

오늘도 환율은 천정(변동상한선)에 닿을 거라는 예측을 떨쳐 버릴 수 없는
탓이다.

외국인 주식투자한도가 이날 50%로 확대되면 사정이 나아질 것으로 예상
했던 터라 불안정도는 더욱 컸다.

바로 30분전인 출근때만 해도 M대리는 전날 확인한 4억달러 어치의 외국인
주식매수 사전주문을 떠올리며 "오늘은 시장상황이 좀 나아질 것"이라는
생각을 했었다.

M대리의 비관적인 예측근거는 시장이 열리기 전에 들은 악재성 소식 두가지
였다.

하나는 국제신용평가 기관인 무디스사가 이날짜로 한국 기업과 금융기관들의
신용등급을 떨어뜨렸다는 점이고 다른 하나는 국제 금융시장에 "한국 정부가
IMF측에 자금지원 일정을 앞당겨 달라고 요청했다더라"는 루머가 번진 점.

이 루머는 한국의 외화자금난이 더욱 심화됐다는 해석을 낳게 했다.

개장을 불과 2~3분 남겨놓은 시각, M대리는 더욱 심한 불안감을 가질 수
밖에 없었다.

주문이 나오는 환율수준이 심상치 않았던 때문이다.

단말기에 뜨는 팔자주문은 매매기준율보다 무려 1백32원50전이나 높은
1천7백원.

특별한 얘기를 들을 수 있다고는 생각지 않았지만 다른 은행 딜러들에게
전화를 걸었다.

전화기를 타고 흘러 나오는 얘기는 "최악의 상황이 될 것"이라는 한숨섞인
전망들뿐.

오늘도 한국은행으로 부터 "달러배급"을 받는게 불가피하다는 생각을
굳혔다.

오전 9시30분.

팔자주문은 그대로 1천7백원인데 사자주문이 급격히 높아졌다.

개장후 1분이 채 안돼 1천7백원에 나온 매도물량은 순식간에 게눈 감추듯
소화됐다.

지난달 20일 환율변동폭이 확대되면서 5~10분씩 늦어진 "눈치보기식 탐색전"
도 종지부를 찍고 말았다.

거래된 금액은 대략 2백만~3백만달러.

아마도 원화사정이 좋지 않은 기업이나 환차익을 실현하려는 일부 은행들이
물량을 내놓은 것으로 시장참가자들은 보고 있다.

첫거래가 높은 수준에서 체결되자마자 M대리 책상위의 전화가 불난듯
울어대기 시작했다.

어떻게 될 것 같으냐, 지금 사둬야 하느냐, 해외상환용으로 빌려줄 물량이
없느냐 등등.

일반 전화기들은 슬그머니 내려 놓고 거래때만 쓰는 "핫라인"으로
기업체들에게 연락을 취했다.

"큰손" 대접을 해 주자는 취지에서다.

접수받은 주문은 "사자"만 5백만달러 가량.

달러가 워낙 귀해 팔자주문을 내놓는 곳이 있다면 업어주고 싶은 심정.

그러나 환율의 "환"자라도 안다면 그럴 턱이 없다.

물량확보를 위해선 사자주문 가격을 더 높여야 한다고 연락을 취하는 그
잠깐동안 환율은 달러당 5원이나 더 오른 1천7백15원.

M대리의 뇌리에 어제 상황이 떠올랐다.

개장 40분후 환율이 상한선에 닿자 "팔자"가 실종, 거래가 중단된 탓에
실수요증빙을 갖춰 한국은행에서 간신히 달러화를 조달했었다.

"레이트(환율)불문 작전"을 펴기로 했다.

단말기에 상한선인 1천7백19원80전으로 사자주문을 쳐 넣었다.

1천7백19원에 나온 물량이 있어 일부를 살 수 있었고 나머지는 모두 상한선
에 거래됐다.

그러나 상한선에서의 거래는 수명이 역시 짧았다.

외환시장에서 거래가 체결된지 채 3분도 안된 오전 9시 34분.

"상한선까지 치솟았다면 내일도 더 오를텐데 미리 내놓아 봐야 손해"라는
심리가 퍼지고 외환시장에서 달러화는 어제처럼 씨가 말라 버렸다.

달러화를 팔려는 측이 없어진 마당에 거래가 성사될리 만무하다.

거래가 중단된데 걸린시간은 개장후 고작 4분밖에 안됐다.

거래량은 불과 3천만달러 안팎.

허탈한 심정.

더이상 단말기를 쳐다볼 이유가 없다.

평소 시장걱정을 함께 하던 외국계은행 딜러에게 다이얼을 돌렸다.

"대권후보들의 IMF 재협상 주장으로 해외 투자자들의 시각이 더욱
냉랭해지고 있다"고 걱정이다.

연말까지 결제할 수요와 비교하면 1백억달러 가까운 과부족이 생긴다는
얘기가 돌고 있다고 전해준다.

수급상황이 이렇다면 2천원도 결코 방어선이 될 수 없다고 우려한다.

이날도 M대리는 어제처럼 단말기가 아닌 서류와 씨름을 했다.

고객들의 결제용 달러화를 한국은행에서 사기 위해 첨부하는 실수요증빙서류
를 꾸민 것이다.

M대리는 "장중에 서류작업을 하는 이상한 외환딜러"는 빨리 없어졌으면
한다.

"이상한 딜러"가 사라진다는 것은 곧 외환시장 안정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 박기호 기자 >

(한국경제신문 1997년 12월 12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