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경제가 짙은 안개에 휩싸여있다.

"시계제로"상태에서 조타수를 잃고 표류하는 망망대해의 선박과 같다.

한보 기아 등 대기업의 잇따른 부도로 촉발된 외환 및 자금시장의 공황은
기업들의 사업기반을 뿌리채 흔들어 놓았다.

근로자들은 고용불안에 바들바들 떨고 있다.

정책실기로 여론의 지탄을 받고 있는 정부당국은 급기야 IMF(국제통화기금)
에 목을 매기에 이르렀다.

이런 지경에 답답하고 불안한건 일반 국민이 훨씬 더하다.

전 경제부총리였던 김준성 이수그룹 회장(77)과 연극배우 손숙씨(53)의
대담으로 그 답답증을 다소나마 풀어본다.

< 편집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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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담 = 손숙 연극인 ]


-IMF구제금융을 받는게 세간의 말처럼 "경제신탁통치"를 의미하는 건가요.

<> 김회장 =법정관리니 경제신탁통치란 말은 좀 과장된 표현입니다.

IMF가 돈을 대줄 때는 우리경제가 건전한 성장을 할 수 있도록 조건을 달
뿐이지요.

이를테면 과도한 성장을 한 것은 아닌지, 방만한 경제운용은 없었는지,
혹은 기업들의 과다한 시설투자는 없었는지를 따져 조언을 하는 것입니다.

이 과정에서 정부는 경제성장속도를 늦추고 기업은 감량경영을 하는 등
전반적인 긴축이 불가피합니다.

우리 경제가 최근 어려움을 겪는 이유는 고도성장과정에서 싹튼 거품을
적절한 산업구조조정을 통해 제거하지 못한데 있습니다.

따라서 IMF금융지원을 계기로 경제주체들이 구조조정작업을 벌일 경우
경제체질을 강화할 수 있다고 봅니다.


-금융실명제를 보완하면 사정이 좀 나아질까요.

<> 김회장 =금융실명제는 부의 편재와 음성적인 부의 축적 등 사회문제를
시정하는데 많은 역할을 한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지하자금을 양성화하는데는 실패했어요.

한 연구기관의 조사에 따르면 금융실명제 실시이후 오히려 지하자금규모가
증가하여 30조원에 이르고 이중 현금보유가 7조원이나 된다고 합니다.

다시 말해 지하자금을 산업자금화하려 했던 취지를 살리지 못한 것입니다.

더욱이 금융소득에 대한 종합과세를 강행함으로써 저축의욕을 저하시키고
결과적으로 소비를 조장한 측면이 있습니다.

그런데도 정부는 부작용을 파악하고 보완책을 마련하려는 노력을 등한시해
자금흐름이 원활치 못했습니다.

사람으로 치면 혈맥이 막혀버린 꼴이 됐습니다.

중소기업의 부도가 급증한 원인도 여기에 있다고 봅니다.


-대기업들이 벌써부터 축소경영을 선언하면서 대량 감원을 발표하고
있습니다.

고개숙인 남편들이 홍수를 이룰까 걱정입니다.

<> 김회장 =우리는 6.25이후의 어려운 여건에서도 근검 절약정신을 바탕
으로 난관을 극복한 경험이 있습니다.

현재의 산업구조는 과거보다 탄탄한 편입니다.

이 기회를 이용해 정부 기업 및 국민들이 2,3년간 고통을 감내하면 우리
나라는 경제거품을 제거하고 선진국에 버금가는 산업구조를 갖게 되리라고
봅니다.


-요즘 국민들이 가장 불안해하는 것은 치솟는 환율(달러 대비 원화)인 것
같아요.

외국은행들이 우리나라에 돈을 빌려주지 않으려고 한다지요.

<> 김회장 =기본적으로 우리경제가 위기에 처한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정작 큰 문제는 위기의 배경이나 정체를 규명하려는 노력이 태부족
하다는데 있지요.

작금의 경제문제가 어디서 연유됐는지를 밝힌 후 치료법을 찾아야 할
것입니다.

또 외국투자가들에게 신뢰를 주려는 노력을 게을리한 점도 반성해야 할
점입니다.

지금은 무엇보다 국가의 신용을 회복하는데 노력해야 할 시점입니다.


-환율이 오르면 기업부담이 크게 는다고 걱정들인데 환율이 오르면 우리
경제에 어떤 영향을 미칠까요.

<> 김회장 =환율이 오르면 수출이 잘되는게 사실입니다.

따라서 무역수지 적자도 줄어듭니다.

반면 외화를 끌어다 쓴 기업들의 이자부담이 늘어납니다.

그런데 문제는 우리만 환율이 오르는게 아니고 동남아국가들의 환율 역시
가파르게 올라 환율상승효과가 떨어진다는 점이지요.

또 바이어들은 환율이 오른 만큼 제품가격 인하를 요구하거나 결제통화를
바꾸자고 나오는 경우도 있어요.

또 환율상승은 물가에 영향을 줄 위험도 있고...

사실 원화환율은 그동안 과대평가된 경향이 있었어요.

환율은 그나라 돈가치(구매력)인데 호텔 요금 등에 비춰볼 때 과대평가돼
있었습니다.

따라서 원화환율의 평가절하가 바람직하지요.

그러나 문제는 경제적인 여러 요인에 따라 환율이 결정되기보다 경제불안에
따른 투기심리가 환율을 끌어올린다는데 있습니다.

외환 및 금융위기의 본질이 바로 여기에 있어요.


-왜 이지경까지 됐는지 답답합니다.

<> 김회장 =우리나라는 아무것도 없는 상태에서 사람의 힘만으로 경제를
일으켜 세웠지요.

그것도 30년이란 짧은 기간에 말입니다.

그것은 정부가 주도했기 때문에 가능했습니다.

대기업이 부도나면 정부가 해결해 주는 식이었지요.

구제금융을 제공하고 여차직하면 주인을 바꾸었지요.

외국에서 보면 기업재무가 부실해도 대기업은 절대 부도나지 않는다고
생각하게 됐고 그래서 신용을 유지할 수 있었어요.

여기에서 엄청난 거품이 생겼습니다.

그런데 기아사태가 발생하면서 상황이 확 바뀌었습니다.

외국 은행들이 옛날과 다르다는 것을 알게 됐지요.

그 결과 달러를 빌려주는 것을 꺼리게 됐고 최근의 외환 금융위기는 바로
여기에서 빚어진 것입니다.


-선진국클럽인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에 가입한 것도 좀 성급하지
않았나요.

<> 김회장 =외형이나 수치로 보면 우리나라도 선진국이라고 할 수 있어요.

무역규모가 12위이고 1인당 국민소득이 1만달러이니까요.

그러나 수치만으로 단순히 비교하면 곤란해요.

스톡(Stock)개념이 있어야 해요.

이탈리아 등 유럽국가들의 경제수준은 일본 등에 훨씬 뒤처지지만 유서
깊은 관광자원을 확보하고 있는 경쟁력있는 국가지요.

OECD 가입으로 얻는 것(관세인하 정보교환 등), 잃는 것(시장개방)이
있는데 정부와 국민들이 샴페인을 너무 일찍 터뜨린건 사실입니다.


-요즘같은 불경기때 돈을 불리는 방법은 무엇일까요.

주식투자로 피해본 사람들이 많다던데요.

<> 김회장 =오랫동안 다양한 경험을 했다고 해서 그런 질문을 가끔 받지요.

이를테면 현명한 재산관리기법에 대한 얘기인데...

예전에는 3분법을 많이 얘기했습니다.

전재산의 30%정도는 부동산에 투자해 물가불안의 위험을 줄이고, 또다른
30%는 장기예금, 나머지는 현금효과를 가질 수 있는 상품에 투자하란 것이
었지요.

지금은 그렇게 말하기 어려워요.

주식도 불안하고 부동산도 각종 규제와 세금으로 쉽게 손대기 어려워요.

그렇다고 예금이자로만 살라고 권하기엔 무리인 것 같고.

좀 기다렸다 결론을 얻는게 현명할 것 같아요.


-경제난국에 국민들이 할 수 있는게 뭐가 있을까요.

<> 김회장 =거품을 빼는데 다같이 노력해야 해요.

박정희시대의 새마을운동과 같은 의식개혁도 뒤따라야 합니다.

박정희씨는 무속신앙 등 수천년동안 내려오던 정신적 가치를 의식개혁운동
으로 바꿨습니다.

요즘처럼 집팔아 전세살고 자동차를 사야 한다는 생각으론 난국을 헤쳐
가기 어려워요.

일본의 1인당 국민소득은 우리의 3배가 넘는데도 월평균 외식비와 가구
구입비, 옷에 쓰는 경비는 오히려 우리가 많다고 합니다.

반면 저축률은 서울이 29.6%인데 비해 도쿄는 35.0%입니다.

차기 대통령은 누가 되든지 우선적으로 정책의 초점을 국민의식의 혁신적
전환에 맞춰야 한다고 봅니다.

요즘 한국경제신문사에서 전개하는 경제살리기 범국민캠페인이 우리의
의식을 바꾸는 기폭제가 될 것으로 확신합니다.

< 정리=이익원 기자 >

(한국경제신문 1997년 12월 3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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