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경제가 IMF에 구제금융을 요청하게 된 것을 외국 언론에서는 한국도
"일본병"을 앓고 있다는 식으로 보도하고 있다.

내용인즉 정부 은행 기업간에 구축해놓은 너무도 끈끈한 상호의존관계
때문에 거품이 걷히고 부실기업이 속출하자 은행이 흔들거리고, 따라서
정부의 금융정책 자체가 경제회생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 증세라는
것이며, 일본이 사실상 그 원조라는 것이다.

일본의 금융산업이 안고 있는 문제의 기원은 제2차대전 직후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맥아더 군정은 일본에 자유시장 경제체제를 이식하기 위해 군벌의
비호를 받고 있던 거대한 재벌들을 해체하는 작업에 착수했다.

소유와 경영을 분리하면서 재벌들의 몸집을 줄일 뿐만 아니라 유능한
경영인들을 발굴하여 이들이 기업발전의 견인차가 되도록 유도하였다.

이 단계에서 정부가 손을 떼고 모든 기업이 자유경쟁에 의해 스스로의
운명을 개척하도록 했더라면 좋았을 터인데, 정부는 금융기관을 일종의
정책 매개체로 이용하여 기업경영에 깊숙이 간여토록 조치했다.

그 이후로 대기업들은 경영계획 상품개발, 심지어는 임원의 승진 선임
등에 이르기까지 직간접으로 금융기관의 간섭을 받아왔다.

이는 곧 대장성과 통산성의 지휘를 받아온 것으로 해석해도 무방할 정도다.

이 때문에 일본에서는 기업의 자유스러운 진입과 퇴출이 어렵고 모든
산업조직이 "계열화"되어 있으며, 이로부터 경쟁제한 이권개입 정경유착
등의 비리가 끊임없이 발생한 것이다.

최근 일본신용은행이 전국에서 17번째로 큰 은행임에도 불구하고 경영위기
에 부딪쳤다.

대부분의 전문가들이 이 은행의 파산을 권유하였으나 대장성은 해외자산을
줄이고 조직을 재정비하는 선에서 이를 살려내기로 결정했다.

그 과정에서 외국은행의 진입이 철저히 봉쇄되었던 것이며, 따라서 일본
정부의 재정부담이 엄청나게 컸던 것이다.

다시 말해 일본 금융산업의 경쟁력제고가 또한번 지연되는 결과를 낳은
것이다.

하시모토 정부가 금융산업의 빅뱅(대개혁)을 시도하겠다고 장담하고 있으나
이러한 일본내 관-업-금융간의 끊기지 않는 고리가 상존하는 한, 그리고
대장성 간부들의 보호주의적 의식이 없어지지 않는 한 일본 금융산업의
빅뱅은 구호에만 그칠 가능성이 크다.

최근에는 다쿠쇼쿠 은행과 야마이치 증권사의 도산에 있어서도 일본
정부는 간섭의 끈을 늦추려 하지 않고 있다.

일본의 경우는 그렇다 치고 동아시아의 다른 나라 상황은 어떤가.

태국과 한국의 경우를 보면 사정이 흡사하다.

기업 도산→은행부실→정부 떠맡기 식으로 연결되는 상황이 대동소이하다.

작년말 태국 최대의 종합금융회사인 파이낸스원이 도산하였다.

도산 원인은 이 회사가 지원하고 있던 몇개의 대형 부동산회사가 쓰러지면
서 이들과 관계된 계열회사들이 대형부도를 냈기 때문이다.

태국에서는 부동산 경기가 가라앉고 거품이 빠지자 부동산만 믿고 대출을
확대해왔던 금융기관들이 뿌리째 흔들리고 있는 것이다.

현재는 태국 정부가 나서 다른 종금회사들에 공동인수를 종용하고 있는
중이나 결과는 만족할만한 수준에 이르지 못하고 있다.

우리나라의 경우도 일본 태국의 경우와 맥을 같이 한다.

우성 유원 삼미 진로 기아 대농 쌍방울 뉴코아 등으로 이어지는 부도사태는
부동산만 있으면 2중 3중 은행대출을 받을 수 있다는 금융관행에다, 최악의
경우는 정부가 나서 법정관리나 3자인수 등을 주선해줄 것이라는 막연한
기대와 무책임한 기업관행의 합작품이라 볼 수 있다.

"일본병"으로는 특징지어지는 동아시아 국가들의 금융위기는 최근 이 지역
에서 나타나기 시작한 거시경제의 부진현상과도 맞물려 결코 안심할 수 없는
상황으로 번지고 있다.

아세안(ASEAN)국가들의 평균성장률은 금년에 5% 이하로 떨어질 것 같고
경상수지 적자도 IMF가 위험수위라고 보고 있는 GDP 대비 5% 선을 넘을 것
같다.

우리나라의 경우도 98년 성장률을 2.5%로 줄일 것을 IMF로부터 종용받았
었다.

금융질서 교란과 거시경제전반의 부진현상이 겹치면 30년대초 대공황과
같은 총체적 경제파탄이 일어날 수도 있다.

이는 동아시아 몇 나라만의 문제가 아니라 전세계로 확산될 가능성이
얼마든지 있다.

결코 안이하게 대처할 일이 아니며 우물쭈물할 시간이 없다.

먼저 우리는 은행대출이 많은 분야중 거품성 사업이 무엇인지를 빨리
파악해내는 것이 중요하다.

우리나라의 경우 건설, 부동산, 재래식 장치산업 등이 이에 해당될 가능성
이 높다.

둘째로 업체규모의 대소를 가리지 말고 부실 기업인은 경영에서 손을 떼고
유능한 국내외 기업인들이 M&A 등을 통해 등장할 수 있도록 진입-퇴출을
자유화해야 한다.

셋째 금융기관들도 정부나 대기업의 영향권에서 벗어나 국민기업형 체제로
변환되도록 개혁하는 것이 좋은 것이다.

넷째 경기침체국면을 역으로 이용하는 것도 생각해볼 일이다.

즉 금리를 하향조정하고 IMF와의 협조아래 외화유입을 조절함으로써
(국내에서 금융교란이 일어나지 않도록)최선을 다할 일이다.

일본병을 털고 소생하려면 일본이 현재 추진하고 있는 개혁 이상의 개혁을
지금 착수하지 않으면 안된다.

재경원이 분발해야 한다.

(한국경제신문 1997년 12월 2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