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종 32년(1452) 2월 17일 세종대왕이 54세로 돌아가자 왕세자인 문종이
2월 22일에 즉위한다.

문종은 5월 13일 일부 인사이동을 단행하면서 34세의 하위지를 신숙주와
같이 사헌부 상령(정4품)으로 승진 이동시킨다.

직언으로 간쟁하는데 능하여 대간들의 간담을 서늘하게 해온 그의 능력을
높이 사서 그로 하여금 이 대간의 요직을 담당하게 하였던 것이다.

이때 황희와 두 아들들인 황치신(1397~1484) 황수신(1407~67) 등 13인을
함께 임명하는데, "문종실록"에서는 유독 하위지에 관해서만 다음과 같이
장황하게 그 승진 이유를 밝혀 놓고 있다.

"하위지는 강개하고 세상을 바로 잡으려는 뜻이 있어 매양 경연에서 시강
함에 헌체(임금을 보좌하여 선을 권하고 악을 못하게 하는 것)하는 바가
많았었다.

그 형 하강지가 일찍이 죄를 범하여 전라도에서 갇히게 되자 위지는 사직
하고 돌아가 보살피려 하였다.

세종은 그것을 아름답게 여겨 특명으로 휴가를 허락하고 역마를 주어 가게
하였다.

강지가 여러 고을로 옮기며 갇히게 되었는데 매양 옥문과 공정(관아)에
드나들 때마다 위지가 목칼과 족쇄를 부축해 주며 곁을 떠나지 않으니,
보는 이들마다 탄식하며 어려운 일이라고 생각하였었다.

이 직책을 제수함에 글을 올려 사면하였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과연 하위지는 사헌부 장령이 되자 그 강개한 기질을 유감없이 발휘하기
시작한다.

5월 21일에 함길도 온성부사로 임명된 양경로가 각박한 인물이니 변방
신개척지인 온성을 맡겨 다스리게 할 수는 없다고 그 관직을 거둬들이도록
요청한다.

문종은 그대로 이를 받아들인다.

양경로는 순천부사가 되었을때 아전 수십명으로 하여금 항상 자기 주변의
쉬파리떼를 때려 쫓게 하였는데 만약 한마리라도 눈앞에 나타나면 그들의
볼기를 칠 정도로 잔인하고 포악한 인물이었다.

5월 27일 세종대왕의 백일재가 진관사에서 성대히 치러지자 5월 29일에
사헌부 장령 하위지는 전에 불상을 만들고 불경을 베끼며 절을 짓는 등의
불사를 정지하도록 요청하였으나 허락받지 못하였던 사실을 지적하며 앞으로
점안(불상을 봉안하는 날 마지막으로 눈을 그려넣는 의식)을 경찬하는 불사
등을 정파할 것을 강력히 요청한다.

그리고 나이 어린 왕세손을 정도, 즉 성리학으로 교육시켜 불교를 가까이
하지 못하도록 하라고 아뢴다.

문종은 가을과 소상 대상의 3차례 불사는 이미 소헌왕후 상사 때의 예에
따라 행할 것임을 선언하고 왕세손의 교육은 철저하게 정도에 따를 것을
약속한다.

6월 23일에는 문종이 도섭리(도설리:설리는 어선을 맡아보던 내시부의
벼슬. 관용적으로 섭리라 발음한다)의 인장을 주조하여 섭리를 총괄하게
하려 하자 장령 하위지는 옛날에 이런 제도가 없었던 사살을 들어 이 명령을
거둬 들이기를 즉각 요청한다.

이에 대해 문종은 다음과 같이 해명하고 하위지 말에 따른다.

"내가 인신을 주고자 하는 것은 권력을 그에게 주려는 것이 아니라 출납
하는 물건에 인을 찍어 신표를 삼으려고 했을 뿐이다. 사람들이 모두 일
맡기는 것으로 의심하고 네가 지금 또 청하니 내가 마땅히 네 말을
따르겠다"

하위지가 이렇게 즉각 반응한 것은 문종이 세종과 달리 환관에게 일을
맡기려는 조짐이 보였기 때문이라 한다.

세종은 환관을 억제하여 조그마한 일도 그들에게 맡기지 않고 작은 비위
사실만 있어도 엄하게 다스렸었는데, 문종은 이들에게 너그러워 즉위하자
마자 충호위 상림원 사복시 군기감 등 궁내의 여러 아문을 관장 감독하게
함으로써 그 세력이 자못 커질 우려가 있었다.

이에 하위지는 당시 여론을 대변하여 과감하게 이런 상소를 올림으로써
환관의 발호를 미연에 방지하였던 것이다.

6월 12일 세종의 재궁(시신을 모시는 관)을 영릉에 장사지내고 7월 1일부터
문종이 친정하게 되니 7월 5일에 사헌부에서는 6조의 기본 정강을 제시하며
올바른 정사 시행을 요구한다.

1. 시종 일관할 것, 2. 정 사를 구분할 것, 3. 취미에 유혹되지 말 것,
4. 언로를 막지 말것, 5. 강건하되 관용할 것, 6. 작위의 수여를 공정히 할
것 등이 그것이었다.

이런 6조의 정강도 하위지 의견이 크게 작용한 것이었다고 생각된다.

드디어 문종은 7월 6일 대규모의 인사 개편을 단행하여 조정을 천정체제로
바꾸어 놓으니 이때 김종서는 승록대부(종1품) 좌찬성이 되고 정분이
우찬성이 되며 정인지가 좌참찬, 이계전이 도승지가 되며 왕세손은 왕세자로
책봉된다.

이에 박팽년이 세자 시강원 보덕(종3품)이 되고 이석형은 필선(정4품)이
되며 이개는 문학(정5품)이 되고 유성원은 사경(정6품)이 된다.

그런데 문종은 이 인사에서 승 신미에게
선교종도총섭밀전정법비지쌍운우국이세원융무애혜각존자라는 존호를 올려
과거 태조 이전에 왕사를 책봉하던 전례를 부활하는 듯한 인상을 주게 된다.

이에 하위지는 7월 8일에 다음과 같은 상소를 올려 이를 간쟁한다.

"이제 산릉의 일이 이미 끝나서 전하가 비로소 만기를 친재하니 안팎이
눈을 비비며 간절히 유신의 정치를 바라고 있습니다.

그런데 처음 정사에 간사한 중에게 존호를 주었으니 바르지 못하게 된 것이
이보다 더 큰 것이 없습니다.

이에 신등은 놀라움을 이기지 못하니 청컨대 이 명령을 거두십시오.

주자소를 둔 것은 조종이 문예를 숭상하는 아름다운 뜻이 있는 것인데
전하의 첫 정사에서 갑자기 혁파하였으니 옳지 못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이에 대해 문종은 신미의 존호는 이미 세종이 정해 놓은 것이며 주자소는
혁파한 것이 아니라 지금 일이 없으므로 잠시 쉬게 하였을 뿐이라는 궁색한
변명으로 하위지의 강공을 회피해 보려 한다.

그러나 하위지의 직언이 그 틈을 주지 않는다.

"신미의 칭호가 비록 선왕이 뜻이라 하더라도 전하가 첫 정사에서 맨 먼저
그것을 거행하였으니 바깥 사람들이 누구인들 전하가 높이고 존중한다고
하지 않겠습니까?

주자소는 비록 임시로 파하였다 하나 신은 어떤 사람이 그 활자를 관장
하는지 알지 못하겠습니다.

만약 관장하는 사람이 없는데 갑자기 책을 인쇄할 일이 있게 되면 대단히
정교한 일을 아마 졸지에 해내지 못할 것입니다"

문종은 할 수 없이 주자소일만은 다시 생각해 보겠다고 양보하고 신미의
존호는 선왕의 뜻이라 거둬들이지 못하겠다고 한다.

그러자 7월 9일 하위지는 다시 이렇게 아뢴다.

"전일에 하교하기를 신미의 칭호는 선왕께서 정하신 것이라 하였으나
신등이 물러가 생각하니 이는 근고에 없는 일입니다.

예전에 공민왕조에 있어서는 왕사 국사의 칭호가 있었습니다만 우리 태종
세종이 힘써 물리쳐서 깊게 끊어 놓았는데 이제 갑자기 이런 칭호를 준다면
심히 옳지 않다 하겠습니다.

이것이 비록 세종의 유교라 한다 하더라도 신등이 오히려 이해하지
못하겠는데 하물며 다른 신들이겠습니까?

나라 사람들은 반드시 전하가 더욱 존경을 가하여 이런 일이 있을 것이라고
말할 것입니다.

일이 진실로 이치에 어긋난다면 비록 세종의 유교라 할지라도 또한 마땅히
헤아려서 행해야 이에 대효가 될 터인데 도리어 이런 옳지 않은 일로 선왕의
유교를 일컫는다면 의리에 어떻겠습니까?

청컨대 그것을 환수하십시오"

문종은 이렇게 대답하며 물러서지 않는다.

"세종께서 일찍이 하교하시기를 "왕사라고 부른다면 안되지만 그밖의
벼슬은 무방하다" 하셨었는데 이는 왕사가 아니고 다른 벼슬과 같으니 어찌
안될 것이 있겠느냐?

만약 세종의 하교 있었다면 비록 왕사라 할지라도 역시 마땅히 공경하고
따라야 한다"

7월11일에도 하위지는 이 일을 가지고 문종께 매달려 밤 4경에 이르도록
간절하게 충간하는데 문종은 비록 들어 주지는 않았지만 그 일을 매우
아름답게 여기었다고 한다.

7월12일에도 하위지는 다시 신미의 칭호가 부당함을 간절히 아뢰보지만
문종은 확실한 소신을 가지고 이를 거부한다.

그러나 7월16일에는 사헌부에서 연명으로 상호하여 "나라를 돕고(우국),
세상을 이롭게 한다(리세)"라는 존호는 현인군자에게 주는 칭호인데 간사한
승려에게 돌아갔으니 이는 있을수 없는 일이라 하며 이의 삭제를 주청한다.

문종은 이 일이 대신과 의논하여 한 일이니 더 고집하지 말하고 자른다.

그러나 하위지는 이렇게 아뢴다.

"정치를 하는데는 사정을 분별하는 것보다 더 큰 것이 없습니다.

사정을 분별하지 않고 다만 대신의 의논만을 따른다 하니 신등은 두려움을
이기지 못하겠습니다"

이날 문종은 자신의 스승인 박중림의 자제 자신과 가장 가까운 친구인
박팽년을 이 일로 파직시킴으로써 자신의 강경한 태도를 중외에 천명한다.

다음 날인 7월17일 하위지는 사헌부 대사헌 이승손(1394~1463) 등과 함께
연명으로 상소하여 박팽년을 신구하며 우국이세의 칭호를 삭제할 것을
간정하지만 문종은 요지부동이었다.

가장 가까운 친구인 박팽년까지 희생양으로 삼으면서 이를 고수하려 하자
하위지는 7월22일, 박팽년과 함께 처벌해 줄 것을 요청하지만 이 역시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한국경제신문 1997년 11월 28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