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만열 교수를 만나기로 한 날.

그날은 이교수가 몸담고 있는 백범 김구선생 기념사업협회에서 주최한
국제학술대회가 있었다.

행사를 마치자마자 급히 달려왔다는 이교수는 흥분된 어조로 "가장 존경하는
인물로 늘 백범을 꼽으면서도 실제 우리가 하는 일이 뭐가 있느냐"며 탄식
했다.

백범을 기리는 행사에 기자 한명 참석하지 않았다며 요즘의 세태를 꾸짖는
것이었다.

경남 함안의 시골에서 태어난 "촌뜨기" 이만열 교수.

그의 삶과 사상은 신앙 민족 역사라는 세단어로 압축된다.

초등학교 1학년때 주일학교 선생님이던 문성주 장로의 가르침을 통해 민족에
대해 눈을 뜨게 됐다.

신학을 공부하고 싶었지만 사학을 전공으로 택했던 것은 어쩌면 가장 예민한
나이에 분단을 경험, 민족사에 대한 관심이 높아졌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서울대 문리대를 거쳐 서울대 대학원에서 한국사 박사학위를 받았고
숙명여대에서 70년부터 강의를 시작했다.

80년대에는 군부세력에 의해 느닷없는 4년간의 "해직교수" 생활을 겪어야만
했다.

하지만 평탄하지 않았던 삶이 오히려 그의 학문에 대한 열정을 더욱 뜨겁게
했다.

그는 올 여름방학 내내 "백범일지"에 매달렸다.

원본에 충실하면서도 가장 쉽고 정확한 "백범일지"를 출간하기 위해서였다.

최근에는 우리 경제사학계 일각에서 주장하는 "식민지 근대화론"을 정면으로
반박, 학계의 논쟁에 불을 붙이기도 했다.

""경제성장"과 "근대화"란 말로 일본 식민지 시대를 미화할 수는 없다"는
것이 그의 주장.

예전부터 해오던 사회활동을 아직 접지 못하고 있다.

다산과 백범 기념사업회 활동외에도 한국기독교역사연구소 소장, 남북나눔
운동 연구위원장을 맡고 있다.

외국인노동자 선교협의회 공동대표로 외국인 근로자를 돕기 위한 활동도
벌이고 있다.

하지만 그는 오늘도 밤늦게까지 연구실의 불을 밝히는 학자로 남고자 한다.

(한국경제신문 1997년 11월 25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