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학용 < 고려대 국제대학원장 >

최근의 한국경제를 보고 있노라면 겉으로는 멀쩡한 청년이 무엇인가
중병에 들어 쓰러져가는 모습이다.

경제성장률은 금년에도 6%이상이고 물가는 5%이내, 경상수지 적자는 금년
들어 작년보다 훨씬 줄어들어 1백30억달러에 불과할 예정이라고 한다.

이런 지표로만 보면 우리 경제는 아무런 문제가 없는 것 같다.

그러나 증시가 폭락하고, 외국인들은 투자회수에 열중하고 있고, 환율은
천정부지로 올라가고 있다.

뿐만 아니라 국내 기업인들은 최악의 불황이라고 피부로 느끼고 있으며
심지어 불룸버그와 같은 외국 언론들은 한국경제 상태를 현실보다도 더
비관적으로 보도하고 있다.

10일자 아시아 월스트리트저널은 한국산업은행이 발행한 2006년짜리
채권의 이자는 미국 재무부 채권이자율에 비해 3.8%나 더 올라가 인도에서
발행하는 채권과 비슷한 가치에 거래되고 있다고 전했다.

도대체 무엇이 우리경제를 이지경으로 만들었으며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한단 말인가.

우선 한보사태 기아사태 기타 주요 대기업들의 부도사태를 통해 우리나라의
금융기관들과 일부 대기업들의 재무구조 취약성이 만천하에 드러났다.

이것을 알게된 외국 투자기관들은 손해를 보면서도 자금회수를 시작하였고,
이는 연쇄적인 외환부족사태를 불러와 모든 국내 금융기관들은 매일매일
외화부족을 막기 위해 전전긍긍하고 있다.

정부나 다름없는 한국산업은행이 발행한 채권이 중국이나 인도의 그것과
비슷하다고 하며 한국은 곧 IMF에 지원을 요청하게 될지도 모른다고 보도되고
있다.

수출이 점차 회복되면 이런 외환부족사태와 한국금융기관들의 신용도가
나아져야 할텐데 그렇지 않은 이유는 무엇인가.

당장 수출이 좀 늘어난다 해도 옛날과 같이 수익성이 좋은 수출산업이
없다는 것이다.

주종 수출산업들의 전망이 어둡다는 판단인 것같다.

반도체 자동차 섬유류 철강 등 우리 주종수출산업들이 선진국들과 개도국들
사이에서 고전하고 있다는 것이다.

우리나라 제조업부문의 평균임금은 이미 영국보다도 높다고 하지 않는가.

다행히 일찍부터 과감히 외국으로 진출한 자동차회사나 철강회사는 좀
사정이 나은 편이다.

더구나 우리나라 대기업들의 경영구조는 전근대적이다.

기업총수의 의사에 의해 엄청난 투자결정이 정해지는 것이 상례이며 그것에
대한 철저한 수익성과 경제성분석이 부족한 듯하다.

최근에 문제가 되는 자동차산업의 중복투자나 레저산업의 과잉투자에 의한
부도사태 등은 전문경영인들의 의사결정이라고 하기 힘들며 그런 투자결정의
오류에 의한 부도기업이 한둘이 아니지 않는가.

대기업 집단의 의사결정과정에 획기적인 변화가 있어야 하겠다.

흔히들 주인이 없으면 기업이 망한다고 하는데 주인이 있어도 그 주인이
올바른 판단을 하지 못하고 그것을 견제할 제도적 장치가 없다면 주인이
있는 회사라고 반드시 성공하는 것은 아니지 않는가.

집단체제의 의사결정이 오히려 나을수도 있다.

그러면 현 시점에서 정부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옛날과 같이 정부가 부도기업에 일일이 간섭하지 않겠다는 태도는 원칙적
으로 맞는 얘기다.

그러나 과거 몇십년 동안 해오던 관행을 하루아침에 고칠수는 없다.

그렇다고 과거와 같이 모든 부도기업들을 국민경제를 살린다는 의미에서
구제할 수도 없고, 또 선별적으로 강제로 통폐합할 수도 없다.

고육지책으로 부도유예조치니, 화의신청이니 하며 금융권이 자율적으로
해결케 하는데도 한계가 있다.

파급효과가 큰 몇개의 기업은 적극적인 방법으로 회생시키는 방법을 찾아야
한다.

기아사태가 대표적인 예인데 "국민기업으로 육성시킨다"는 발표는 발상부터
틀렸다.

왜 국민기업이어야 하나.

대주주들이 스스로 운영토록 강력히 지원하되 "국민기업"이란 말을 쓰지
말았어야 한다.

외국인들은 벌써 한국이 70년대로 되돌아가고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정부의 지원하에 주주들이 대표를 뽑고, 새로운 경영체제를 이루고, 특히
종업원지주제같은 인센티브제도를 도입하여 노사의 화합을 도모했어야 했다.

그래서 국민기업이기 보다는 순수한 민간기업으로 재기해야 한다.

또 가장 시급한 것은 우리 금융기관들을 정상화하는 일이다.

이미 시작한 금융개혁안을 빨리 통과시켜 금융기관들이 안고 있는 부실
채권 문제들을 해결할 수 있는 방안을 마련해 줘야 한다.

이 문제를 해결하려면 모든 정당들이 이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모든 대선
주자들도 하루속히 이 문제부터 해결해야 한다는 의지를 보여야 한다.

지금 획기적인 금융개혁정책이 나와도 국제사회에서 인정받으려면 3~6개월
의 시간이 필요할지도 모르기 때문에 모든 정치활동에 앞서 이 일을 해결해야
하겠다.

나라 경제가 망하고 나서 대통령이 되면 무슨 보람이 있단 말인가.

(한국경제신문 1997년 11월 17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