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준혁 < 메타 대표.문화기획가 >

대선주자들의 TV공개토론이 심심치 않게 이뤄진다.

대부분의 진행형식이나 내용전개는 천편일률적이다.

정치적 스캔들에 대한 해명으로부터 시작해 초반부에는 자신이 얼마나
청렴하고 결백한 사람인가를 증명해 보인다.

그리고 나면 정치 경제 사회에 대한 질문과 답변이 이어지고 끝무렵에는
국방 안보 외교 등이 종합적으로 다뤄진다.

질문을 던지는 사람들은 사전에 많은 자료를 검토하고 준비할 것이다.

예상되는 답변에 따라 다음 질문을 어떻게 전개해야 좋을지도 예측할 것임에
틀림없다.

이에 답하는 대선주자들의 준비는 더욱 어려울 터이다.

자신의 과거를 완벽하게 합리화시킬수 있어야 하며, 국민들이 왜 자신을
원하고 자신의 정치적 결단이 왜 구국의 결단인지 호소력있게 알려야 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대선주자들처럼 자신과 자신의 과거에 대해 많은 공부를 하는
사람들은 드물 것으로 보인다.

또한 정치 경제 교육 국방 통일문제 등에 대해 전문가 이상의 지식과 정보와
판단력을 보여줘야 한다.

뿐만 아니라 답변하는 태도, 표정은 물론 손짓이나 시선까지 모두 트집
잡히지 않아야 하니 얼마나 많은 준비가 필요할지 짐작조차 되지 않는다.

이런 점들을 생각하면 대선주자 모두에 대한 경탄을 금할수 없게 된다.

그러나 대선주자들이 그렇게 열심히 준비하고 공부하는데 빠진게 한가지
있다.

우리 국민의 정신과 심성, 그리고 문화적 기반에 대한 것이다.

그들은 한결같이 사건과 제도, 정책에 대해서만 이야기한다.

우리 일상사에서 정치와 경제 등이 전부고 따라서 그것만 해결되면
우리나라가 유토피아가 될 것처럼 호언장담한다.

그러나 이것만이 전부가 아니라는 사실을 우리 국민은 잘 알고 있다.

사실 아무리 좋은 제도나 정책이라도 이를 수용할수 있는 문화가 갖춰져
있지 않거나 낙후돼 있으면 아무 쓸모가 없다.

제도가 문제가 아니라 의식과 문화가 문제인 것이다.

현재 우리 국민의 의식과 문화는 어떤가.

우리 국민은 60년대이후 경제개발과 성장우위에 찌들어 제대로 된 건전한
정신문화를 가지지 못했다.

물질주의에 병들어 마음은 쪼그라들어 항상 초조해하는게 바로 우리 국민
이다.

군사정권의 권위주의로 장벽이 처진 외진 섬에서 수십년동안 사는 사이에
개개인은 왜소해졌으며 수천년간 이어져온 가족과 의리, 따스함도 사라져가고
있다.

이렇듯 국민 모두가 이기적으로 변하고 정신이 타락하면 선진국으로
들어갈수 없다는 것은 분명하다.

이런 상태에서 통일이 돼도 남한과 북한은 융화되지 않고 더 많은 문제를
일으킬 것이란 점도 누구나 잘 알고 있다.

그런데 차기정권을 맡겠다는 대선주자들은 병든 국민을 어떻게 치유
하겠다는 말은 한마디도 없이 30년전과 마찬가지로 더 잘 먹여 주겠다든지,
더 잘 보호해주겠다고만 한다.

이제는 우리의 정신, 썩을 지경에 이른 정신을 바로 잡아야 할 때다.

우리의 심성, 황금에 눌려 물기가 다 빠진 심성을 치유해야 할 때다.

이를 위해서는 우리 사회가 튼튼하고 수준높은 문화를 회복해야 한다.

이러한 정신과 문화에 대한 안목을 갖춘 지도자만이 우리나라를 선진화
시키고 바람직한 통일을 맞이할수 있게 할 것이다.

백범 김구선생은 이미 반백년전에 "내가 원하는 우리나라"라는 글을 남겼다.

백범일지 끝부분을 장식하는 이 글은 선생께서 칠십이 넘은 나이에 우리나라
의 장래를 내다 보면서 쓴 글로서 마치 요즈음의 대선주자들에게 전해달라는
듯 보인다.

그 첫머리만 읽어도 부끄러워 고개를 들기 어렵지만 문화비전에 대해
일언반구도 없는 대선주자들을 위해 다시 한번 읽지 않을수 없다.

"나는 우리나라가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나라가 되기를 원한다.

가장 부강한 나라가 되기를 원하는 것은 아니다.

내가 남의 침략에 가슴이 아팠으니 내 나라가 남을 침략하는 것은 원치
않는다.

우리의 부력은 우리의 생활을 풍족히 하고 우리의 강력은 남의 침략을 막을
만하면 족하다.

오직 한없이 가지고 싶은 것은 문화의 힘이다.

문화의 힘은 우리 자신을 행복하게 하고 나아가서 남에게 행복을 주겠기
때문이다"

(한국경제신문 1997년 11월 15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