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한석 <한국통신 통신경제연 경제분석팀장>

어느때부터인지 우리에게 규제완화라는 용어는 너무나 친숙해져 버렸고,
요즈음은 심지어 정치적 구호로도 사용될수 있을 정도로 손쉬운
만병통치해법이 되었다.

작고 효율적인 정부를 너도 나도 외치지만 실제로 그 규모는 계속 커져만
왔고, 오랫동안 계속되어 온 규제완화에도 불구하고 산업체든 서비스
업체든 규제가 실제로 줄어들었다고 하는 말은 별로 들리지 않고 있다.

한쪽에서는 규제를 완화해 주었다고 하고,상대측은 아니라고 반박하는
이 모순은 도박이 끝난후 딴 돈과 잃은 돈을 합해보면 맞지 않는 현상과
별반 다르지 않은 것 같다.

그 이유는 어디에 있을까.

우선 우리나라의 규제완화는 체계적이지 못하고 일관되지 않기 때문에
실질적인 효과를 거두지 못하고 있는 경우가 너무 많다.

예를 들면 공장 설립허가에 필요한 서류의 종류는 줄였지만, 어차피
준비해야 하는 서류는 여전히 갖추기 어렵거나 시간이 오래 걸려서 전체
서류 준비의 노력이 별로 줄지 않았다든지, 혹은 타 관공서와 협조가 필요한
부분은 그대로라든지, 혹은 공장은 설립 소요시간이 줄어들었지만 실제
공장 운영을 위한 여타 규제는 그대로라든지 등등.

결국 해당 사업이나 공장 운영에 있어서 최종 생산과 유통 소비 사이클이
별로 개선되지 못하게 되는 경우, 시혜되었다는 규제완화는 제구실을 하지
못하는 결과가 나오게 된다.

다음으로는 규제를 완화함에 있어 우리나라의 행정의 불투명성으로 인해
혼선이 생기고 유권해석의 불확실성이 남는 경우, 여전히 행정 지연과
뇌물수수등의 폐단이 남게 되어 의도된 규제 완화의 효과가 나타나지 못하는
경우가 있다.

허가가 등록으로, 또는 신고로 바뀌어도 실질적으로는 허가나 진배없는
등록 또는 신고는 말뿐인 규제 완화이다.

등록이나 신고를 거부하는 것이 그 예라 할 것이다.

영-미 제국의 행정절차를 우리나라의 관료들이 보면 아마 숨막힌다고
할 정도로 세세하고 치밀하다.

소위 행정절차법이라는 것들인데,표면적으로 보면 관료주의의 극치처럼
보일지 모르지만 실제 내용에 들어가 보면 관료들의 행정권 오남용 여지를
없애주고, 모든 관계자들에게 예측 가능성을 부여해 주며, 결과적으로는
행정의 불투명성을 없앰으로써 뇌물수수의 여지를 없애고 공정하고 합리적인
결과를 도출해 내고자 하는 각종 장치들과 그 장치들의 상호 연결고리들로
빼곡히 차있다.

우리의 경우 규제완화라는 명분하에 행정관료(집단)들의 유권해석은
재량적으로 이루어지고,그 과정에서 관료의 권한은 줄어들 줄 모른다.

다음으로 생각할수 있는 것은 규제완화로 한쪽에서는 행정규제가 줄어들고
있는 반면 다른 쪽에서는 새로운 규제가 계속 생겨나고 있는 것을 들수 있다.

문민정부들어 행정쇄신위원회가 발족되어 그간 많은 기여를 해왔지만,
우리사회가 계속 커지고 발전해 나가는 과정에서 새로 만들어지는
규제조치들에 대해서는 별로 신경쓸 처지가 못되었다.

많은 사람들이 병원에서 사망하고 그 결과 인구가 줄어들고 있지만, 같은
병원 다른 구석에서는 신생아들이 계속 태어나 인구를 늘리고 있는 것과
같다.

우리나라의 법률은 대부분의 경우 행정부의 행정관료 집단에 의해 초안이
작성되고 관련 부처와 일부 이해 당사자(주로 기업등 공급자 집단)들과의
협의및 의견수렴을 거쳐, 대개 1회 정도로 그치고 마는 공청회라는 곳에서
형식적인 논의가 있은 후 법제처의 법률적합성 검토를 통과하고, 최종적으로
국회에서의 심의 의결을 통해 법률로 탄생한다.

우리나라 국회의 현실을 감안할 때 당연히 초안을 작성하는 행정집단의
이해관계가 법률의 곳곳에 심어지고,그 결과 규제완화로 잃게 된
행정관료들의 권한은 다른 곳에서 새로 장악할수 있게 될뿐 아니라 행정집단
자체의 성장과 발전을 위한 배려가 법적인 뒷받침을 새로 받게 되는 현상이
만연하게 된다.

헌법에 의해 보장되는 국민의 기본권을 국가 또는 사회의 중요한 공동의
가치를 추구하기 위해 불가피하게 제한하는 것은 국민의 대리자 집단인
국회의 의결을 거쳐 제정되고 시행되는 법률에 의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상식적인 논리를 생각해 볼때, 우리나라의 법률 제정행태는 지금의 행정관료
위주에서 하루 빨리 국민의 대리자들인 국회의원들에 의해 심각하게 논의되고
제정되는 체제로 바뀌어야 한다.

다음으로 규제완화를 제대로 하여 의도하는 산업의 경쟁력강화및 국민의
복지증진에 이바지하기 위해서는 행정절차들을 선진국 수준으로 투명화
합리화하는 노력이 있어야 한다.

이러한 노력들은 개별적인 법률 개정이나 행정조치의 개선에 우선되어야
한다.

이런 노력은 개별적이고 부분적인 행정규제 완화를 달성하는 동시에
우리 사회에서 경제및 사회질서를 심각하게 위협하고 있고 우리나라가
선진국으로 가는 것을 결정적으로 막는 뇌물 문제를 대폭 줄일수 있는
성과로도 보상받을수 있을 것이다.

(한국경제신문 1997년 11월 8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