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상훈 <은행감독원 부원장보>

포천지가 미국 500대 기업을 처음 발표한 1956년 당시 100대 기업에
들어있던 기업중 최근까지 그 명단에 남아 있는 기업은 30개도 안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사람으로 치자면 불혹에 이르는 40년동안 100대 기업중 70여개가 바뀐
셈인데, 이처럼 세계적인 대기업들도 한편에서는 도태되고 다른 한편에서는
새로 태어나고 있다는 사실을 보면 기업의 흥망성쇠는 어쩌면 세월이
흐르면서 나타나는 자연스러운 현상의 하나로 볼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올들어 우리가 겪은 한보사태 이후 삼미 진로 대농 기아 뉴코아
해태 등 대기업들의 연이은 부실화는 우리 경제-사회에 커다란 충격을
주었을 뿐만 아니라 앞으로 사고의 대전환없이는 더 큰 어려움을 겪을 수도
있다는 교훈을 주는 중대한 사건으로 보아도 무리는 아닐 것이다.

이들 대기업의 부실화 요인을 한마디로 설명하기는 어렵겠지만 무엇보다도
기업환경의 급격한 변화를 따라가지 못하는 경영마인드를 지적할수 있다.

과거 저금리의 정책금융지원과 고성장-고물가 경제구조하에서는 은행돈을
빌리는 것 자체가 기업에 이익을 가져다주는 것이었다.

특히 차입자금에 의한 부동산관련 투자는 사업전망이 있고 없고를 떠나
항상 자본이득을 가져다주는 달콤한 사탕과도 같은 것이었다.

그러나 90년대 들어서는 상황이 크게 변해 남의 돈을 과다하게 빌리는 것
그 자체가 경영을 압박하는 요인으로 작용하게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업들은 우리정도의 규모이면 금융기관들이 계속 돈을
빌려주겠지 하는 대마불사의 안이한 사고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이와 같은 과거지향적 경영사고는 다음과 같은 과정을 통해 구체적으로
나타났다.

첫째 외형성장위주의 무리한 사업확장이다.

대표적인 예로 한보그룹의 경우 신규사업확대및 사업다각화를 무리하게
추진한 결과 국내 계열사수가 92년에는 4개에 불과하였으나 96년에는 무려
22개로 증가하였으며 나머지 기업들도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사정은
비슷하였다.

둘째 무리한 사업확장이 외부차입에 주로 의존하면서 이루어졌다는 점이다.

더욱이 상당수의 부실기업들은 외부차입을 단기 고금리자금에 주로
의존하였으며 심지어는 고정자산에 대한 투자분까지도 대부분을 단기성자금에
의존하는 경우가 다수 있었다.

셋째 외부차입에 의한 사업확장은 재무구조가 비교적 견실한 모기업의
채무보증에 주로 의존할 수밖에 없었으며, 그 결과 모기업을 포함한
전체기업의 동반 부실화를 자초하게 되었다는 점이다.

결국 외부차입에 의존한 무리한 사업확장은 과다한 금융비용부담으로
귀착되었으며 이는 다시 타인자본 의존도, 특히 단기자금 의존도를
심화시키는 악순환으로 연결되어 자금부족사태의 반복과 재무구조 악화를
가속화시키는 요인으로 작용하였다.

한보 삼미 진로의 금융비용부담률이 96년말 현재 30대계열 평균금융비용
부담률 4.9%보다 4~5배 높은 18.6~24.0%에 달하고 있다는 사실은 이를
잘 나타내주고 있다.

우리 속담에 "비온 뒤에 땅이 굳어진다"는 말이 있다.

우리는 지금 우리가 직면하고 있는 전환기적 경제의 어려움을 전화위복의
계기로 삼아 도약 발전의 새 장을 열어야 하는 중요한 과제를 안고 있는데,
이를 위해서 불필요한 규제완화등 제반여건의 정비도 필요하겠지만 지금까지
보여왔던 양적성장위주의 경영행태에서 수익위주의 질적경영으로 전환하고자
하는 기업 스스로의 노력이 요구된다.

기업 스스로가 철저한 경영진단과 분석을 통해 수익성이 낮거나 불투명한
부분은 과감하게 도려내고 이와 같은 구조조정을 통해 마련된 자금은 기존의
차입금상환에 충당함으로써 재무구조가 견실화되도록 하여야 한다.

아울러 현금흐름 중시의 경영을 체질화할 필요가 있다.

흑자기업이라 하더라도 현금흐름상태가 좋지 못하면 쓰러질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이와 함께 거래 금융기관,특히 주거래은행과 돈독한 신뢰관계를
유지함으로써 일시적인 어려움에 처하는 경우가 있다 하더라도 "저 기업은
현재의 어려움을 충분히 극복할수 있다"라는 믿음을 확실하게 심어주는
노력 또한 필요하다 하겠다.

기업 스스로의 노력과 함께 금융기관들의 적극적인 협조와 도움 또한
없어서는 안될 것이다.

기업의 체질개선이라는 것이 단시일내에 큰 성과를 거두기는 어려울
것이므로 기업이 성실하게 최선을 다하고 그 성과가 보일 경우에는 비록
일시적인 어려움에 직면하더라도 채권 금융기관들이 적극 협조해주는 풍토가
조성되어야 한다.

이러한 점에서 1990년 영국 영란은행 총재가 행한 연설중 다음과 같은
구절은 우리에게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

"기업이 잘 되어 나갈 때 자발적으로 거래관계를 맺었던 금융기관들은
기업이 어려움에 처할 때 이를 극복할수 있도록 협조해줄 필요가 있다"

(한국경제신문 1997년 11월 7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