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튼 회장 ]

거대한 바다를 연상케 하는 미국 중북부의 이리호.

이 호수를 끼고 서북쪽 끄트머리까지 달리면 캐나다를 동쪽으로 마주보고
있는 미 국경도시 디트로이트를 만난다.

제너럴 모터스(GM), 포드, 크라이슬러 등 미국의 이른바 "빅3"이 몰려있는
자동차 도시다.

이리호가 육지에 둘러싸인 담수호수이면서도 이따금씩 몰아치는 바람에 큰
파도를 일으키듯 디트로이트도 수없는 풍상을 겪어 온 도시로 유명하다.

70년대와 80년대 초에는 두차례에 걸친 세계 오일쇼크로 도시 전체가
휘청거렸고, 80년대 중반부터 90년대 초반까지는 일본 자동차업체들의
공세에 식은 땀을 흘려야 했다.

"빅3"중 막내격인 크라이슬러사는 그 중에서도 가장 길고 오래 시련을
겪은 회사다.

그러나 요즘 디트로이트의 동료 미국업체들은 물론 일본 경쟁업체들로
부터도 경계 대상 1호로 꼽히고 있다.

3년전 미국 회사로는 처음으로 대당 1만달러를 밑도는 소형 승용차 "네온"
을 개발, 일본업체들의 간담을 서늘하게 만든 주인공이 바로 크라이슬러다.

지금까지 6백만대가 넘게 팔려 자동차 역사상 가장 성공적인 차 중의
하나로 기록되고 있는 미니밴 "카라반"도 바로 이 회사의 작품.

크라이슬러는 지난해 2백95만8천8백대의 자동차를 판매, 전년보다 15%가
증가한 6백14억달러의 매출과 35억달러의 순익을 올렸다.

올 1.4분기에도 59만3천1백59대를 판매하는 등 미국 빅3 중에서도 경영
실적이 가장 짭짤하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91년 12%에 지나지 않았던 내수시장 점유율이 지난해 16%로 올라서 GM 등
선발업체들을 바짝 긴장시키고 있다.

특히 미니밴 분야는 미국 시장 점유율이 47%에 육박하면서 세계시장을
선도하는 위치를 굳혔다.

미국 자동차 메이커들 중에서 수익성과 신제품 개발기술 및 속도는 이미
최고 정상의 자리에 올라섰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직원 1인당 연간 생산능력은 현재 33.7대.

오는 2000년까지는 이를 42.5대로 끌어올린다는 목표 아래 경영혁신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그 경영 혁신의 심장부는 디트로이트시 오번힐의 본사 건물과 이어져 있는
크라이슬러 기술센터(CTC)다.

자동차 디자인에서부터 제품 기획, 엔지니어링, 생산 및 판매 기능이
한지붕 아래서 일사불란하게 이뤄지고 있다.

이중 크라이슬러 경영진이 추구하고 있는 "3S 경영"은 미국 내외의 경영
전문가들로부터 사례 연구 대상으로까지 주목받고 있다.

Speed(의사결정 신속화), Strategy(정보의 전략적 배치), System(기능의
효율적 이용)을 3대 모토로 삼고 있는 "3S 경영"은 우선 이 회사의 개발력에
획기적 진전을 가져다 주고 있다.

최근 미국내 소프트웨어 회사인 트릴로지사와 공동으로 부품 등의 데이터
베이스를 개발, 경쟁기업 자료까지 기술자들이 간단히 검색토록 한 것.

그 결과 신차 개발 기간을 재빠르다는 일본업체들보다도 짧은 28개월로
단축시켰다.

이같은 기술력은 크라이슬러를 "한 수 아래"로 내려다보던 디트로이트의
선발 두 회사들로부터 "공동 기술개발 전선 구축"을 제의받을 정도로 회사의
위상 자체를 바꿔놓고 있다.

최근 GM 및 포드와 손잡고 <>전기자동차 <>첨단 배터리 <>전자제어장치
<>고성능 병렬 컴퓨터 시스템 등 미래형 첨단 기술이 망라된 "슈퍼카 프로
젝트"에 착수한 것이 단적인 예다.

크라이슬러의 경영 최고사령관인 로버트 이튼 회장은 "이같은 성공은
종업원과 판매업자 부품공급업자 등 관련자 모두가 세계 최정상급 자동차를
만들기 위해 함께 노력한 결과"라며 부하 임직원들에 대한 깊은 신뢰감을
숨기지 않고 있다.

크라이슬러가 오늘날 안정된 경영궤도에 올라서기까지에는 지난 70여년간
겪어온 수많은 시련과 시행착오가 "쓴 약" 역할을 했다.

지난 1925년 기업가 월터 크라이슬러에 의해 설립된 이 회사는 27년에는
내구력이 큰 차로 유명한 닷지사를 인수, 훗날 크라이슬러의 중요한 디비전
(사업부문)으로 성장시키는 계기를 마련했다.

크라이슬러는 이어 30년대까지만 해도 미국시장 점유율 25%를 차지하며
미국내 2위의 자동차 메이커로서 돌풍을 일으킨 "유망주"였다.

보통명사로 알려질 정도로 유명해진 "지프"도 이 회사의 작품이다.

그러나 40년대에 접어들면서 이 회사는 첫번째 혹독한 시련을 만나게 된다.

2차대전 후 불어닥친 대형화 및 고급화 스타일 경쟁에 뒤처져 점유율이
10%대로 하락한 것이다.

시장환경 변화에 적절히 대응하지 못한 결과였다.

크라이슬러는 이로 인해 맞은 경영상의 어려움을 공격적인 "확대경영"으로
풀어나갔다.

60년대 들어 판매조직을 대대적으로 확대 개편하는 한편 자동차 스타일도
크게 갈아치웠다.

제품라인을 확충하는 조치도 뒤따랐다.

때마침 미국 경제가 "황금의 60년대"를 구가한 것과 맞물려 잠시 크라이
슬러에도 호시절이 다시 찾아오는 듯했다.

그러나 곧이어 찾아든 "유혹"에 크라이슬러는 또한번 빠져들었다.

본업인 자동차 생산 외에 금융과 부동산업에 손을 대는 등 "사업다각화"를
꾀한 것이다.

또 GM과 포드에 뒤진 해외 자동차사업을 강화하기 위해 프랑스의 유럽
거점을 중심으로 스페인 영국 등지에 자회사를 설립했다.

71년에는 일본 미쓰비시자동차에 15% 지분을 출자하기도 했다.

하지만 이처럼 급격한 확장정책은 오히려 부실한 결과를 가져왔다.

자금 부족과 재고의 만성적인 누적, 품질 저하와 함께 경영기반 자체를
흔드는 최악의 상황이 전개됐다.

여기에 결정타를 가한 것이 70년대 중반 돌발한 제1차 석유위기였다.

오일쇼크의 여파로 미국 소비자들이 기름이 적게 드는 소형차를 선호하는
경향이 생겼는데도 미련스러울 정도로 대형차를 고집하는 둔감한 경영은
불에 기름을 끼얹는 효과로 고스란히 나타났다.

마침내 크라이슬러는 79년 11억달러의 누적 적자를 안은 채 폐업 일보
직전의 위기상황으로 몰렸다.

이 때 크라이슬러에 "구세주"로 등장한 인물이 포드자동차에서 막 건너온
리 아이아코카 회장이었다.

아이아코카는 임직원들에게 "고통 분담"을 취임 제일성으로 주문했다.

자신의 연봉을 단돈 1달러로 정하는 솔선수범을 보였다.

그의 이같은 행동은 종업원들을 감동시켰다.

노조원들로 하여금 회사살리기에 적극 동참토록 하는 분위기가 조성됐다.

이어 그는 35명이나 되는 부사장 중 33명을 해임했다.

8천5백명의 종업원을 해고하는 조치도 뒤따랐다.

감량경영의 하이라이트는 연간 2백50만대에 달했던 자동차 생산규모를
손익분기점인 1백10만대 수준으로 줄인 조치였다.

경영에 부담을 안겨주고 있던 유럽(3개)과 남미(4개)의 공장을 팔아치웠다.

호주의 생산시설도 처분했다.

탱크 등을 만들던 군수산업에서도 과감하게 철수했다.

한때 10억달러까지 치솟았던 재고물량을 처리하기 위해 생산 방식도 아예
주문제작 방식으로 바꿨다.

이같은 자구노력을 선행하고 난 뒤 아이아코카는 연방 의회에 15억달러의
채권발행 정부 보증을 요구했고, 의회는 난상토의 끝에 전례없는 정부
지원을 결정했다.

뼈를 깎는 고통을 수반한 크라이슬러의 경영 개혁조치는 82년 이 회사가
길고 어두웠던 적자 행진의 터널을 벗어나 흑자를 거두는 결실로 빛을
보았다.

83년에는 융자금을 7년이나 앞당겨 상환, 세상을 놀라게 했다.

84년에는 당시까지 사상 최고였던 24억달러의 순이익을 기록했다.

이같은 크라이슬러의 경영 회생에 해결사 노릇을 한 것 중 하나는 시장
수요에 맞춘 신차 개발 노력이었다.

연료절약형 2천2백 짜리 "K카"가 극적인 성공을 거둔 것이다.

불필요한 사양을 제거한 K카는 81년에 "올해의 차"로 선정될 만큼 시장에서
선풍적인 인기를 모았다.

그러나 화무십일홍, 크라이슬러에 또다시 고난이 찾아왔다.

아이아코카 회장이 매스컴의 집중 조명을 받는 등 자신의 "경영 신화"에
도취된 나머지 또다시 무리한 사업 확장이라는 전철을 밟기 시작한 게
화근이었다.

다시 팔을 걷어붙이고 국내외 생산라인 증설에 나선 결과는 잇따른 투자
실패 뿐이었다.

92년들어 크라이슬러는 다시금 도산 위기에 몰렸고 아이아코카는 불명예
퇴진이라는 비운을 맛보고 말았다.

크라이슬러 이사회는 경영위기 극복을 위해선 원가 절감이 가장 시급한
과제라는데 의견을 모았다.

이에 따라 당시 GM의 유럽 회장으로 원가절감 경영에서 탁월한 능력을
발휘하고 있던 로버트 이튼(56)을 최고경영자로 영입했다.

"원가 절감에 성공하는 회사만이 살아남는다"는 지론을 펴온 이튼 회장은
취임과 동시에 "크라이슬러 디퍼런스"라는 구호 아래 종래 크라이슬러를
지탱해온 전통과는 전혀 다른 새로운 기업 문화를 주도했다.

그 "디퍼런스"의 결과가 오늘날 크라이슬러가 다시금 맛보고 있는 "중흥"
으로 열매를 맺고 있는 것이다.

(한국경제신문 1997년 10월 14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