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뉴욕 = 이학영 특파원 ]

뉴욕 맨해튼 이스트리버 기슭의 42가에서부터 48가까지 길게 뻗어있는
유엔본부.

지난달 중순 52차 연차총회가 이곳에서 개막됐지만 정작 유엔의
총사령부격인 사무총장실은 평소나 별 다름없이 비교적 한산하다.

중동 보스니아 자이르 등 크고 작은 국제 현안의 당사자들이 문전성시를
이루고 있는 곳은 사무총장실이 아니라 유엔본부에서 몇 블록 떨어져 있는
"유엔 총독부"다.

총독부는 다름 아닌 주유엔 미국대표부.

작년 가을 연차총회에서 미국이 이집트 출신의 부트로스갈리 당시
사무총장을 "말을 잘 듣지 않는다"는 이유만으로 갈아치우는 실력 행사를
한 뒤로 미국대표부에는 이런 별명이 붙여졌다.

당시 석연치 않은 미국의 유엔 사무총장 연임 거부권 행사에 대해 이의를
제기한 나라는 "콧대 높은"프랑스 정도가 고작이었다.

옛 소련의 바통을 물려받은 러시아는 미국에 필적하기는 커녕 미국이
러시아의 잠재적 적대기구라고 할 수 있는 NATO(북대서양조약기구)
회원국으로 동유럽국가들을 마구 끌어들이고 있는데도 속수무책으로
지켜보고만 있는 형국이다.

중국이 미국을 견제할 잠재력 있는 나라로 꼽히고 있지만, 미국의 사전
기꺾기 공세에 움찔해 있는 모습이다.

미국이 티베트와 신쟝성(신강성)등에서의 인권 문제를 놓치지 않고
나꿔채고서는 중국을 압박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나마 경제 분야에서는 국제적인 "군웅할거"시대가 이어져 왔으나
요즘에는 이쪽에서조차 미국 독주가 시작되고 있다.

한때 미국을 궁지에 몰아넣었던 일본은 관료주도형 시스템과 제조업
편향적인 산업정책이 한계에 부딪치면서 마이너스 성장 직전으로까지
몰려있는 상태다.

주변 국가들의 상대적인 부진과 겹쳐 미국의 "화려한 부활"은 더욱
돋보인다.

사실 90년대초까지만 해도 미국은 눈덩이처럼 불어 가던 무역.재정 양대
부문의 쌍둥이 적자 등에 신음하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미국이 대역전 드라마를 일궈낼 수 있었던 것은 물론
때마침 불어닥친 인터넷 등 정보통신시대를 주도할 기술적 우위를 확보하고
있었기 때문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이에 못지않게 중요한 것은 "경쟁력 제일주의"를 고수하며
"경쟁력 향상"을 화두로 삼아 갖가지 개혁을 밀어붙인 각 경제 주체들의
노력이었다.

정부는 특별기구까지 만들어 과감한 규제완화에 나섰고 기업들은 대폭적인
인원 정리 등 고통을 수반하는 구조 조정(restructuring)에 정면으로 나섰다.

그 결과는 연율 3%대의 쾌속 성장과 4반세기만의 최저 수준이라는 4%대의
낮은 실업률, 1%대에 불과한 물가상승률 등 "꿈의 성적"을 기록하는 가운데
세계 곳곳에 "메이드 인 아메리카"의 상품들이 흘러 넘치게 하는 것으로
이어지고 있다.

그러나 정치.경제 양대 분야에 걸친 미국의 일방적인 독주는 한국을
비롯한 세계 각국에 또다른 위협 요인으로 작용하고 있음도 간과할 수 없다.

미국 정부와 기업들이 "미국적 가치 기준"을 전 세계에 적용할 것을
요구하며 해외 각국의 비즈니스 관행에까지 참견을 노골화하고 있는 것도
그런 현상 가운데 하나다.

저임 인력을 고용해 제품을 생산하는 국가나 기업에 대한 국제무역 제재를
골간으로 하는 이른바 "블루 라운드"를 주창한지는 이미 오래다.

최근에는 독일 일본 등 서방 선진국들에까지 만연돼 있는 기업과 정부
관리들간의 "리베이트 수수"문제를 정면으로 들고 나섰다.

이로 인해 미국등 외국계 기업들의 사업참여 기회가 사전 봉쇄되고 있다며
"반부패 라운드"를 출범시킬 것을 소리높여 주문하고 있다.

근래들어 최고의 경기 호황과 함께 탈냉전이 가져다 준 국제
정치무대에서의 독보적 위상을 바탕으로 미국 제일주의(America as the
number one)사조를 확산시키고, 내친 김에 "미국적 가치관"을 지구촌 각국에
심기위해 동분서주하고 있는게 오늘의 미국이라고 할 수 있다.

(한국경제신문 1997년 10월 13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