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전의 노정을 정신없이 달려온 한국경제.

여기에 빨간불이 켜지고 구조조정을 서둘여야 한다고 야단이다.

결코 만만한 작업은 아니다.

그렇다고 애만 태울 수도 없다.

얽히고 설킨 실타레를 어떻게 풀어야 할까.

한국경제신문은 창간33주년을 맞아 "일본 그리고 한국의 산업구조조정"이란
주제로 일본의 다케우치 히로시(장은종합연구소) 이사장과 이한구(대우경제
연구소) 소장간의 특별대담을 마련했다.

두 사람은 양국의 대표적인 이코노미스트로 민간싱크탱크를 이끌고 있다.

이번 대담에서 다케우치 이사장은 "아시아국가들의 동반성장이란 황금기는
끝났다"고 단언하고 "서둘러 하이테크산업 고부가가치산업으로 전환하지
못하면 한국경제도 아시아국가들과의 경쟁에서도 뒤쳐지게 될 것"이라고
강조했다.

< 편집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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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한구소장 =최근 일본경제는 불황을 벗어나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불황이 닥쳐도 무역수지가 흑자를 유지하고, 아무튼 일본경제는 뿌리가
튼튼하다는 느낌이 드는군요.

<> 다케우치 이사장 =글쎄요.

완전히 불황을 이겨냈다고 하기에는 약간 이른 감이 있지요.

저는 아직도 연봉이 40%나 깎인 상태입니다.

일반직원들도 보너스가 크게 줄어들었습니다.

자기수입이 줄어드는데 좋아할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동료들의 해고를 막는 대신 택한 어쩔 수없는 선택이지요.

일본은 이런 노사관계를 만들어내는데 전후 수십년이 걸린 것입니다.

굳이 일본경제만이 갖고 있는 특별한 기반을 찾는다면 기술 현장을
중시하는 정서나 많은 중소기업이 아니겠습니까.

<> 이한구 =일본은 과거에도 여러차례 구조조정을 겪어왔습니다.

대략 시기적으로 얘기하면 65년을 전후한 일본경제의 개방화 국제화시기,
75년께의 세계적인 오일쇼크시기, 85년이후 엔고불황 등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차례차례 짚어봐야 할 것같은데 우선 65년을 전후한 시기입니다.

과연 이기간중 어떤 일들이 벌어졌습니까.

<> 다케우치 =65년은 일본경제가 도쿄올림픽을 치른 바로 다음해입니다.

큰 행사를 성공적으로 이끌면서 대외적인 명성을 얻게 됐습니다.

경제는 개방화 국제화되는 양상을 보였지요.

그전까지 일본기업의 임금수준은 2중적이었습니다.

대기업은 임금이 높고 중소기업은 낮았습니다.

그러나 이 시기에 자동차를 중심으로 한 내구성소비재산업이 급격히
발전하게 됐습니다.

자동차는 아시다시피 많은 부품을 필요로 합니다.

자연 중소기업이 급팽창했지요.

그 결과는 본격적인 노동력부족의 시작이었습니다.

일할 수 있는 인력이 모두 모여도 모자라게 된 공장은 임금수준이 오르게
되고 레스토랑같은 서비스부문에서도 임금이 올랐습니다.

그러나 전반적인 물가상승은 의외로 간단히 해결됐습니다.

중소기업이나 서비스부문의 소득이 올라가면서 국민들이 평등해졌다고
생각했으니까요.

<> 이한구 =그거 다행이네요.

그러나 오일쇼크당시는 좀 달랐을 것같습니다.

세계경제가 워낙 큰 충격을 받았었는데.

당시 한국도 중동건설붐으로 겨우 극복할 수 있었지 그렇지 않았으면
극복하기 어려웠을 것입니다.

<> 다케우치 =한국도 그렇지만 일본이 원자제가 부족한 나라 아닙니까.

석유라곤 한방울도 나지 않는 곳에서 유가상승에 따른 인플레가 본격화
됐습니다.

국민들의 불안감은 대개 두가지 요인으로 다잡을 수 있었습니다.

우선 곧바로 희생양을 찾아냈지요.

종합상사나 석유회사가 나쁘다고 몰아붙였습니다.

물가상승은 이들 회사가 투기를 하고 있기 때문이라는 식으로 책임을
뒤집어 씌웠습니다.

다른 하나는 좀 이해하기 힘드시겠지만, 일본에서는 당시 샐러리맨들이
많은 은행빚을 지고 있었습니다.

60년대에 걸쳐 주택수요가 높아지면서 이들이 빚을 지고 주택을 구입했던
것이지요.

그러던게 전반적인 인플레가 나타나자 오히려 은행채무는 경감되는 양상이
나타난 것입니다.

국민들은 부담을 덜게 됐고 다시 생활이 윤택해졌다고 생각하게 됐던
것이지요.

<> 이한구 =국민들의 입장은 이해할 수 있지만 기업들은 곤혹을 치르지
않았습니까.

<> 다케우치 =그렇습니다.

샐러리맨들이야 은행 빚부담이 덜어지기라도 했지만 기업들은 인플레의
타격을 그대로 받았습니다.

그러나 이것이 계기가 돼 산업이 발달할 수 있었습니다.

왜 한국노래에 "아픈만큼 성숙해지고"라는 게 있지 않습니까.

유가가 오르니 본격적으로 생에너지(에너지절감)기술이 개발되기 시작했습
니다.

산업으로 치면 석유대신에 전기를 사용하려는 취지에서 전자산업이 한단계
도약하게 됐고 또 경박단소형 제품들이 잘 팔리게 됐습니다.

<> 이한구 =말로야 기술개발이 쉽지만 에너지절약형이나 가볍고 작은
제품이 어디 쉽게 만들어지는 것은 아니잖습니까.

<> 다케우치 =당시까지만해도 일본경제는 선진국인 "미국 따라잡기"의
시대였습니다.

이른바 캐치업(Catch up)이 경제의 슬로건이었지요.

석유가격이 오르는 상황에서 가능하면 전기로 에너지를 절감한다는 것은
누구라도 생각할 수 있는 화두입니다.

다만 따라잡기만 하면 되는 시기였고 더군다나 기본적으로 일본인들에게는
앞서도 말씀드렸듯이 자원없는 나라에서 기술개발만이 살길이라는 깊은
정서가 깔려있습니다.

그래서 가능했던 것이지요.

<> 이한구 =85년이후 엔고불황은 어떻습니까.

말씀대로라면 사실 일본경제의 캐치업시기는 끝났다고도 볼 수 있는 시점
아닙니까.

<> 다케우치 =그렇습니다.

엔고불황에 따른 조정은 철저히 실패한 조정이다보니 아직까지도 금융개혁
을 계속 해야 되는 것 아니겠습니까.

사실 엔고불황은 일본경제의 내부에서 시작된 것은 아니었습니다.

선진국들간에 플라자합의를 계기로 인위적인 엔고가 있었고 쌍둥이적자
(재정-무역 적자)에 시달리고 있던 미국의 주가가 폭락하면서 일본이 금리를
낮춰 자금이동을 부추겼던 것입니다.

미국도 계속 압력을 가해 금융자유화를 요구했습니다.

일본내에서는 과잉유동성이 생겨나고 일본의 착각은 이때부터 시작됐습니다

돈이 흘러다니고 엔고로 외국고가품이 간단히 살 수 있게 되면서 일본은
세계무적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버블(거품)경기가 일어나고 저금리로 인해 자금이 부동산으로
흘러들어가면서 지가는 천정부지로 치솟았습니다.

그러나 또한차례 급격한 엔고로 수출경쟁력이 낮아지고 국내의 버블이
꺼지면서 금융기관들은 거액의 불량자산을 떠안게 됐습니다.

아직까지도 일본경제의 발목을 잡고 있는 것이지요.

이 기간동안 정부정책은 완전한 실패였습니다.


<> 이한구 =85년 이후 일본기업들의 해외진출이 가속화되고 세계경영이란
것이 본격화됐다고 볼 수 있는데, 결국 일본 기업들이 해외이전을 서두른
것은 "정부정책실패"의 덕이 컸다고 봐야합니까.

대단한 아이러니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 다케우치 =그렇지요.

기업들은 과거처럼 잘 대응했습니다.

국제적인 시각에서 경영을 하게 됐습니다.

동남아시아로 몰려나가고 미국에서 현지생산을 감행했습니다.

국내에는 하이테크산업만을 남겨놓았습니다.

일본경제전체를 놓고 본다면 이 소장이 지적하셨듯이 85년께면 이제
더이상 캐치업할 것이 없는 단계였다고 볼 수 있는데 긴 불황의 터널을
빠져나온 지금은 정보산업의 소프트웨어 멀티미디어의 컨텐츠(Contents)
부문에서 완전히 주도권을 빼앗겼습니다.

다시 캐치업하는 상태로 떨어졌지요.

물론 과거와 같이 정부가 주도적으로 나서서 따라잡을 수 있는 부문은
아니겠지만요.

<> 이한구 =일본의 경험으로부터 도움을 얻기 위한 자리지만 한국 얘기를
좀 해야 할 것 같습니다.

한국도 구조조정기에 있다고들 말하는데 이를 원만히 해결하자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 다케우치 =한국경제는 고성장을 구가해왔습니다.

특히 성장의 속도가 무척 빠르다는 것이 주목할만 했습니다.

그러나 성장속도가 빠르다는 것에는 장점이 있지만 단점도 있습니다.

지금은 빠른 템포의 단점과 부작용을 경계해야 할 시기입니다.

예를 들어 한국은 정부개입이 지나치게 많은 사회입니다.

금융같은 경우가 그렇지요.

그러나 경제가 일정단계 이상으로 발전한 상황에서 정부개입이 지나치면
경제발전에는 방해만 됩니다.

정부개입은 한창 가난을 벗어나기 위해 경제발전의 페달을 밟을 때 필요한
것이고 지금은 그야말로 "보이지 않는 손"에 의한 경쟁이 필요한 시기입니다.

<> 이한구 =전후 일본경제는 여러 난관을 잘 이겨왔습니다.

지속적인 기술개발이 이뤄지고 불황을 앞서 돌파하는 주도산업을 잘
발견했습니다.

한국은 이런 부문이 부족한 것 같아서 평소에도 일본의 비결을 궁금해했는
데.

이같은 성장의 프로세스(과정)를 받쳐줬던 기업의 시스템은 어떤 것이었다
고 분석할 수 있습니까.

<> 다케우치 =이 문제도 역시 85년을 기준으로 달라집니다.

그 이전까지 일본기업들의 기본적인 시스템은 연공서열 종신고용같은 소위
말하는 일본적 경영이었습니다.

연공서열은 기본적으로 보텀업(의사결정 등이 밑에서 의견을 수렴, 위로
올라가면서 취합된다는 의미)방식이란 것을 말하며 종신고용은 종업원들의
충성심을 극도로 끌어내는 기폭제로 작용했습니다.

즉 정부주도하에 선진경제를 따라잡자는 경제에서는 일본적 고용만큼
효과적인 경영시스템도 찾아보기 어려울 것입니다.

종업원들도 존중받았지요.

그러나 85년 이후는 큰 변화가 생겨났습니다.

예를 들면 과거 일본기업에 주주는 큰 의미가 없는 집단이었습니다.

주로 금융기관 등의 대출로 경영자금을 조달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기업의 자기자본 비율이 높아지고 지금은 자본시장을 통해 자금을
조달해야 하는 시절이 됐습니다.

기업의 평가가 주가에 의해 정해지게 되고 주주가 중요해졌습니다.

상대적으로 종업원들에게는 차가워질 수밖에 없는 것이지요.

충성심은 감소하고 특별한 메리트가 없으면 회사를 옮겨다니는 시대가 된
것입니다.

<> 이한구 =그동안 한국 일본 중국 동남아국가들은 어느정도 분업적
형태를 유지하면서 발전해왔습니다.

5~10년정도 후에 이같은 구도에 어떤 변화가 예상됩니까.

그같은 예상에 따라 한국경제에 충고하고 싶으신 점이 있다면 어떤
것입니까.

<> 다케우치 =아시아국가들은 이소장이 지적하듯 동반 발전이 가능했습니다

그러나 앞으로는 치열한 경쟁뿐입니다.

저는 태국의 환율위기가 그런 예라고 생각합니다.

조지 소로스가 주범이라는 등 얘기하지만 지난 수년동안 중국이 자국통화를
절하해왔고 이것이 태국의 수출을 급속도로 위축시켰던 것입니다.

큰 틀에서 보면 중국경제가 급부상하면서 태국경제는 경쟁력을 상실한
것이지요.

앞으로 아시아국가들은 통화의 절하경쟁을 벌여야 할지도 모릅니다.

한국도 재빨리 산업구조를 전환하지 못한다면 그 장래는 그리 밝지
못합니다.

하이테크산업을 크게 일으켜 돌파구를 만들어야 합니다.

그러려면 기초적인 기술, 나아가서는 기능공들이 있어야 합니다.

기술은 어린 나이에 익힐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 측면에서 교육개혁은 아주 중요한 작업입니다.

< 정리=박재림 기자 >

(한국경제신문 1997년 10월 7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