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개(1417~56)는 자를 청보 또는 백고라 하고 호를 백옥헌이라 하였다.

자와 호가 가리키듯이 청수한 기질과 고결한 품성을 타고나서 옥골선풍
으로 칭송되었는데 체질은 옷의 무게도 감당할 수 없을 듯 섬약하고 얼굴은
미녀가 무색할 정도로 잘 생겼었다 한다.

그는 고려왕조를 끝까지 지키다가 운명을 같이 한 목은 이색(1328~96)
선생의 증손자였다.

목은 집안은 부친인 가정 이곡(1298~1351)으로부터 평지돌출로 갑자기
부상한 신흥 명문가였다.

이곡의 부친 이자성(?~1310)은 충청도 남쪽 서해 바닷가 한산의 이름없는
향리에 불과하였는데 그 세아들중 막내로 태어난 이곡은 13세에 부친이
돌아가시자 가난으로 고향을 지키지 못하고 유랑하다가 반대편 동해 바닷가
영해에 정착하여 그곳 토호인 함창김씨 김택의 서랑이 된다.

족보에 향교 대현이라고 그 직함을 밝히고 있는 것으로 보아 영해 향교의
훈도였을 듯한데 어떻든 이곡은 김택의 후원으로 도평의사사의 서리로 진출
하게 된다.

그 집안 신분에 어울리는 직분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가 나서 자란 시대는 원의 고려 지배가 기틀을 잡아가면서
고려의 신분질서가 교란되던 혼란기였다.

반세기 가까운 대몽항전 끝에 몽고에 항복해가는 과정에서 일부 부몽세력
들이 원의 세력에 의지하여 상층신분으로 부상해가는 반면 항몽에 앞장섰던
상층가문들이 몽고지배가 확실해지면서 몰락해갔기 때문이다.

더구나 충선왕이 왕위를 태자인 충숙왕에게 선위한 다음 충숙왕 원년(1314)
윤3월 19일에 연경에 만권당을 세우고 당대 제일 문유들인 염복 요수 조맹부
(1254~1322) 우집(1272~1348) 등을 불러들여 학문과 예술의 연찬을 함께
하며 고려의 신진 재사들을 양성해내면서 부터는 혁신이념인 주자성리학이
이들을 통해 고려에 본격적으로 전해지게 되니 이 혁신 외래이념을 수용해
들이는 가문이 경향 각처에 서서히 출현하면서 성리학 이념에 입각한 새로운
과거제도를 통해 중앙으로 진출해오게 된다.

이런 기회에 지방의 향리 가문 자제들도 그 새로워진 과거를 통해 중앙
귀족으로 신분상승을 도모하게 되는데 이곡의 경우가 바로 그런 대표적인
예이다.

사실 이런 새로운 과거제도는 이곡의 나이 17세되던 해인 충숙왕 원년에
처음 실시되기 시작하였던 것이니 충선왕은 이해 1월 13일에 유학제거로
충선왕을 시종하여 연경에 와서 10년동안 머물면서 주자학을 익혀온 이재
백이정을 귀국시켜 주자학을 처음 도입해들인 회헌 안향(1243~1306)문하에서
그와 동문수학한 찬성사 국헌 권부(1262~1346)와 삼사사 일재 권한공(?~1349)
등과 더불어 성균관을 정비하여 주자가 주를 달아놓은 주자집주본 유교경전을
가르치며 이를 시험보는 성균시, 즉 거자과를 신설하게 하였던 것이다.

이에 이곡은 충숙왕 4년(1317)에 20세로 석재 박효수(?~1337) 방하의 이
거자과에 급제한다.

그리고 3년 뒤인 충숙왕 7년(1320) 9월 7일에는 익재 이제현(1287~1367)이
지공거가 되고 박효수가 동지공거가 되어 시험을 치른 문과에 다시 급제한다.

그러나 출신이 워낙 한미하였기 때문에 벼슬길에 나가지 못하자 29세때인
충숙왕 13년(1326)에는 원나라에서 치르는 정동행성 향시에 응시하여 3등으로
합격한다.

원래 원나라에는 과거제도가 없었는데 충선왕이 만권당을 세우던 해인
충숙왕 원년, 즉 원 인종 연우 원년(1314)에 만권당의 빈객 중의 하나인
요수의 청으로 충선왕이 인종에게 주청하여 이 해 윤3월 30일에 이의 실시를
천하에 선포하게 되었던 것이다.

이 과거시험의 응시자격이 고려 자제들에게도 주어졌던 것은 물론이다.

이에 이곡은 본국에서의 환로진출이 신분상 제약으로 쉽지 않은 것을
통감하고 원나라 과거를 통해 발신할 뜻을 세우고 우선 정동행성 향시를
거쳐 원의 대과에 도전하였던 것인데, 드디어 36세되던 해인 충숙왕 복위2년
(1333), 즉 원 순제 원통원년 6월에 갑과 제2등으로 전시에 당당히 합격한다.

고려자제로 상등에 급제하기는 처음이었다.

즉일로 한림국사원 검열관에 제수하니 이로부터 이곡은 원나라와 본국에서
의 벼슬길이 훤히 열리게 된다.

이해 6월 8일에 14세로 등극한 원 순제는 고려와 특별한 관계가 있는
인물이었으니 제위다툼 과정에서 고려의 대청도에 유배되어 와 있다가
옹립되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고려에 대한 관심이 이곡을 상등으로 급제시켰을 듯한데 뒷날
고려출신의 후궁인 행주 기씨를 제2황후로 삼은 것으로도 이를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어떻든 이곡은 이후 원나라의 유림랑 정동행 중서성 좌우사 원외랑의
벼슬을 거치게 되자 본국에서는 그가 40세 되는 해인 충숙왕 복위 6년(1337)
여름에 성균관 제주 예문관 제학 지제교의 벼슬을 내려 고려 최고 유학자임을
인정한다.

그래서 49세 때인 충목왕 2년(1346)에는 지밀직사사를 거쳐 정당문학
(종2품), 진현관 대제학, 지춘추관사의 재상직에 오르고 뒤이어 한산군에
피봉된다.

51세 때는 광정대부(정2품) 도첨의 찬성사에 이르고 54세에 이 벼슬에서
돌아간다.

그래서 이곡은 자신에 관한 글을 쓸 때마다 포의(평민)에서 일어나 재상에
까지 이르렀다는 말을 빼지 않고 쓰고 있다.

그가 벼슬길에 진출하여 일가족을 개성으로 이주시키는 것이 얼마나
어려웠었던가 하는 사실은 그의 나이 31세에 비로소 얻은 외아들 목은
이색을 처가인 영해에서 낳았다는 것에서 확인할 수 있다.

이미 23세에 문과에 급제하고 있는데 8년동안이나 자신의 식솔마저
상경시키지 못했었다면 그 형편을 대강 짐작하고도 남을만 하다.

가정 이곡이 이처럼 어렵게 발신하여 재상의 지위까지 올라간 것에 비해
그의 외동아들로 영해 호지촌 외가에서 태어난 목은 이색은 부친의 음덕으로
충혜왕 복위 2년(1341)에 겨우 14세의 어린 나이에 성균시에 합격하고
16세에 별장(정7품)의 벼슬을 받는다.

이제 고려 최상층 명문가로 부상하였음을 증명한 사실이었다.

그래서 목은이 19세에 장가를 들려 하자 당시 최고 명문집안에서 서로
사위를 삼고자 하여 혼례 당일까지도 서로 다투었을 지경이었다 한다.

결국 목은은 당대 제일 명문집안 중의 하나인 안동 권씨에게 장가드는데
그 장인은 화원군 권중달이었고 그 처조부는 우정승 일재 권한공이었다.

이제 목은은 재상의 아들로 누대 명문 재상가의 사위가 되었으니 그의
능력만 있다면 얼마든지 명문의 기반을 다져갈 수 있게 되었다.

그런데 목은은 부친보다도 더 월등한 재능을 타고 났다.

그래서 26세때인 공민왕 2년(1353)에 고려 문과에 을과 1인으로 장원급제
하고 다음해 3월에는 원나라 대과에 갑과 2등으로 급제하여 원과 고려에서
문한을 담당하는 온갖 청요의 직책을 두루 거치다가 결국 공민왕 20년(1371)
7월 16일에는 정당문학의 재상반열에 오르고 우왕 8년(1382) 11월에 판삼사사
(종1품)가 되고 우왕 11년(1385)에 검교 문하시중으로 오른다.

우왕 14년(1388)은 목은이 환갑되는 해인데, 이성계(1335~1408)가 위화도
에서 회군해 와서 6월 8일 우왕을 폐하고 신왕을 옹립하고자 할 때 목은은
우왕의 세자인 창왕을 세우는 것이 당연하다 하여 조민수(?~1390) 등과 함께
6월 9일 창왕을 옹립한다.

그리고 8월 7일에 문하시중이 되어 신하로는 벼슬이 최고 지위에 오른다.

이때 이성계는 그 다음 자리인 수문하시중이 된다.

그러나 새 왕국을 세우려는 딴 뜻을 품었던 이성계 일파는 결국 우왕이
신돈의 혈육이라는 터무니없는 누명을 씌워 창왕 2년(1390) 11월 15일 창왕
까지 다시 폐위시키고 공양왕을 세우는데, 목은이 저들의 뜻에 따르지 않고
고려에 절의를 지키려 하자 12월 1일에 목은과 그 차자인 이종학(1361~1392)
을 역모로 몰아 귀양보낸 다음 공양왕 3년(1392) 4월 4일 포은 정몽주(1337~
92)를 때려죽이고 다음 7월 17일에 이성계가 왕위에 올라 조선을 개국한다.

이성계 즉위 후에 이성계의 근위세력인 정도전(?~1398) 일파는 반대세력을
제거하기 위해 8월 23일에 목은의 둘째자제인 인재 이종학을 매질해 죽이고
목은은 고향으로 돌아가 살게 하는데 조선태조 4년(1395) 11월 24일에는
태조가 목은을 왕궁으로 초빙하여 옛친구의 예로 융숭하게 대접하고 헤어질
때 중문까지 나가 읍하며 배웅하였다 한다.

이런 것들을 못마땅하게 여긴 정도전 일파는 다음해인 태조 5년(1396)
병자 5월초에 목은이 여주 신륵사에서 피서하고 있다는 소식을 들은 태조가
술과 안주를 내려보내어 위로하라 하자 술에 독을 넣어 마시고 죽게 하니
5월 7일의 일이었다.

목은 69세 때이다.

이때 술병을 막았었던 대나무 잎이 강가로 떠밀려가서 대숲을 이루어
그 대쪽같은 절개를 상징하였다는 전설이 여주에 전해오고 있다.

(한국경제신문 1997년 10월 3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