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3년.

민주당과 공화당 후보간의 치열한 접전속에 제44대 미국대통령 선거전이
한창이다.

유권자 길버트(27)씨는 누구에게 표를 던질 것인가를 놓고 고심중이다.

각 후보에 대한 정확한 정보를 아직 못얻었다.

길버트씨는 그래서 인터넷에 들어가보기로 했다.

거기에는 각 후보의 정견과 공약이 상세히 설명돼 있는 것은 물론 후보별
연설장면도 생생한 동화상으로 흘러나왔다.

각종 여론조사도 진행되고 있었다.

"아크로폴리스"라는 사이버토론방에 들어가보니 각 후보의 정견을 놓고
수많은 사람들이 열띤 논쟁을 벌이고 있었다.

길버트씨는 민주당 A후보가 나름대로 21세기에 어울리는 리더라는 잠정적인
결론을 내렸다.

그래서 A후보와 직접 대화를 나누기로 했다.

마침 A후보와의 대담시간이 마련돼 관련 사이트로 들어가 질문을 던졌다.

역시 믿을만한 인물이라는 최종 결론을 지었다.

투표당일 길버트씨는 PC통신에 마련된 투표함을 통해 A후보에게 표를
던졌다"

최근 한 인터넷 전문잡지에 소개된 이 이야기는 먼 미래의 모습이 아니다.

세계는 지금 사이버정치 열풍이 거세게 불고 있다.

수많은 청중을 광장에 불러 모아놓고 목청을 높여대는 대중연설은 점차
빛이 바래가고 있다.

이른바 "길거리 정치"에서 "안방정치 시대"로 급속히 옮겨가고 있다는
얘기다.

혹자는 이를 두고 "고대 아테네의 민회와 같은 또다른 형태의 직접민주주의
가 부활하고 있다"고 말한다.

사이버정치에서 가장 앞선 나라는 역시 미국이다.

지난 95년 대선당시 민주당 빌 클린턴 후보와 공화당 보브 돌 후보간 인터넷
상에서의 "사이버 선거전은 실전"을 방불케 했다.

사용자 규모가 1천2백만명에 이르는 인터넷은 더할 나위없는 기름진 표밭
이기 때문이었다.

두 후보는 모두 인터넷에 홈페이지를 개설, 자신의 프로필.정책설명.정치
이슈토론.여론수렴.후보지원코너 등에 이르기까지 갖가지 정보를 수록했다.

쌍방향통신을 이용한 후보와의 일문일답 코너도 마련했다.

통계에 따르면 당시 미 대선에서 유권자의 20%정도가 사이버 정치공간을
드나든 것으로 나타났다.

우리나라에서는 아직 금지된 사이버공간을 통한 인기조사(Cyber Poll)도
미국에서는 시행되고 있다.

각 후보들은 이같은 사이버폴을 자신의 지지도 추이를 측정하는 주요 기준
으로 삼고 있다.

한마디로 "미국정치를 알려면 인터넷에 들어가라"는 말이 통할 정도가
돼버린 셈이다.

미국 외에도 영국 독일 캐나다 등 선진국들의 주요 정당은 매번 선거때마다
인터넷을 통해 치열한 정책대결을 벌이고 있다.

지난주 영국의 스코틀랜드 의회 부활안이 통과됐던 당시에도 영국 국민들
사이에서는 인터넷이나 PC통신을 이용한 가상공간에서의 찬반토론이 치열하게
펼쳐졌다.

캐나다에서는 야당인 개혁당이 정치에 더많은 직접민주주의 요소를 도입
하자는 취지에서 전자민주주의 제도를 법제화하자는 안건을 제출해놓고 있다.

사이버공간을 이용한 정치조직도 등장하고 있다.

이른바 가상정당(Cyber Party)이 그것.

무형의 단체이지만 전자민주주의가 정착된 21세기에는 이들이 거대한 정치
세력으로 떠오를 것이라는게 전문가들의 한결같은 분석이다.

< 정종태 기자 >

(한국경제신문 1997년 9월 23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