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시간쯤 기다렸을때 핼쓱한 얼굴로 영치가 소사장의 룸으로 안내되었다.

"앉아 임마. 이 분은 아주 얌전하신 백사장님이시다. 인사 올려"

"전 백영치예요. 감기가 걸려서 도무지 나올 수가 없는데, 하도
소사장님이 오라고 해서요. 앞으로 사랑해주세요"

어여쁜 백학 같은 영치는 옛날보다 많이 세련되고 많이 야위어 있다.

보기에 말할 수 없이 피로해 보인다.

"한잔 하고 가렴. 술을 한잔 하면 좀 나을 거야. 자, 잔 받아"

영치는 겨우 팔을 내밀어 잔을 받는다.

최고급 양주인데 반이나 마신 것을 보아 백여사라는 이 아줌마는 많이
취한 것 같다.

"애들 많은데,왜 하필이면 저를 부르셨어요? 오늘은 아파서 못 나온다고
했는데"

"청년도 여기 근무해요?"

"아니 나는요, 소사장님이 가끔 불러서 오는 인디안 재즈바의 웨이터
입니다.

여기는 가끔 아르바이트로 와요.

특별한 분이 오셨을 때죠"

소사장은 약고, 말을 잘 하고, 순해서 영치를 좋아한다.

그리고 그 녀석은 소사장에게 늘 많은 사례를 해서 특히 좋은 손님에게
소개하곤 하는 것이다.

"너 아주 우리 집에 와서 있지 그러냐? 2층에 있는 침실도 독방으로
줄테니. 물론 너니까 하는 소리다.

품성 나쁜 놈은 근접도 안 시켜. 그럼 둘이서 한잔 해.나는 물러갈테니"

소사장은 물러나면서 거나하게 취한 백옥자를 힐끔 바라본다.

백옥자는 한창 흥분이 고조되어 있고, 물개에게 시달린 영치는 영
핵핵거리는 눈치다.

아직 스무살밖에 안 된 놈이고 촌에서 와서 깡다구가 센 영치는
웬만해서는 끄덕도 없는데, 오늘은 아무래도 물개의 여왕에게 많이
시달려서 곧 고꾸라질 것 같다.

"아줌마, 더 취하시면 저와 못 노실텐데요"

그러자 백옥자가 싱그레 웃으면서, "좋아요, 총각. 나는 지금 남자하고
자고 싶은게 아니라 남자를 잊고 싶은 거유"

"실연 당하셨군요?"

"그래요. 인생이 허무하고 불행해서 죽겠어. 자, 마시자구. 섹스를
한대서 내 마음의 병이 낫는 것도 아니고. 나에게는 지금 마음의 병을
고쳐줄 의사가 필요해요"

그러자 영치는 이 순진하고 고상한 아줌마에게 동정심을 느낀다.

그도 그렇게 기막기는 실연을 당하고 영주에서 상경했기 때문이다.

이 아줌마에겐 마음의 위로가 더 필요하구나.

그는 그녀의 옆으로 가면서, "아줌마는 밤새워도 되는가봐" 하고
애교를 살살 떤다.

학같이 깨끗하고 아름다운 그 녀석은 정말 마음도 고와 보인다.

(한국경제신문 1997년 9월 13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