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렇게 해서 지영웅은 두달이나 못 낸 1억짜리 적금을 영신에게
떠안겼다.

그는 그 1억짜리 적금을 130만원씩 매달 붓기 위해 입술이 터지도록
일을 했다.

궂은 일 마른 일을 안 가리고 두 계좌나 되는 1억짜리 적금을 붓고
있지만, 그에게는 정말 큰 짐이 되었었다.

그는 쫓기는 황야의 무법자처럼 피곤했고 살벌하고 사나웠다.

그러나 이제 그는 자신의 피로를 쓰다듬어주고 사랑해줄 암사자를 만났다.

황야의 무법자는 이제 두다리를 쭉 뻗고 서늘한 그늘에서 쉴 수가 있다.

1억짜리를 두 계좌나 붓고 있는 지영웅의 의지에 감격한 영신은
아버지에게 그 적금을 부을 돈을 꾸어달라고 에스오에스를 보내놓고 속으로
쿡쿡 웃는다.

쿡쿡 웃는 것은 그녀의 트레이드마크이고 모든 사람들을 즐겁게 해주고
신선하게 느끼게 하는 자극제가 된다.

그녀는 애교있게 아버지에게 전화를 넣는다.

"아버지, 저에게 돈을 1억만 빌려주세요. 급하게 쓸 데가 있어요"

"병원에 있는 애가 무슨 돈이냐?"

"말죽거리 빌딩을 아버지가 사세요.

그러면 저는 다른 사람한테 보다 싸게 팔게요.

30프로 깎아드릴게요"

"나는 이제 그런 건물 필요없다.

있는 것도 개인 것은 정리하고 싶다"

"아버지가 그 빌당을 안 사주면 저는 다른사람에게 더 싸게 팔아버릴
수도 있어요.

어차피 아버지는 그 빌딩을 반은 가지고 계시니까, 내 지분만 사시면
완벽하게 자기 것이 되고 나는 급해서 판 바보가 안 되지요.

광섬유 무역을 해서 내가 다시 사도 되니까, 급한대로 2억5천만 주시고
인수하세요"

"이 바보야, 그것은 너를 준 것이지, 내가 땅의 임자라고 해서 내
것이라고 생각한 적은 없다.

그러니까 너는 그것 하나도 지닐 능력이 없다는 말이냐?"

"지금 몸이 아프니 용기를 주세요.

아버지, 그러면 1억을 이자받고 꾸어주시고 그 빌딩을 담보로 하시지요"

"갑자기 왜 1억 타령이냐? 너 혹시 그 야쿠자에게 주려는 것은 아니지?"

"아버지, 그 사람은 그렇게 이상한 남자가 아니고 아주 신용할만한
남자에요.

참 아버지의 보디가드 구하셨어요? 수행비서 말이에요"

"떡대같은 서울대학 역도선수가 나의 수행비서로 채용되었거든. 그놈은
머리도 좋고 참 괜찮은 놈이다.

부모도 모두 운동선수들이고. 아무튼 그동안 따라다니던 비서들보다
웃질이다"

"내일까지만 돈을 쓰게 해주세요.

담보도 있으니까.

아시겠어요? 저도 그것은 특별한 의미가 있는 것이어서 안 팔려고
했는데, 미도실크에서 손을 떼면 회사도 차려야 하구요.

지금 머리가 복잡해요"

"알았다. 사업을 위해서 쓴다면 언제든 오케이다"

(한국경제신문 1997년 9월 8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