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에는 가수는 노래를 부르고 춤꾼은 춤을 추었었다.

그런데 요즘은 가수와 춤꾼이 구분이 안된다.

가수가 노래보다는 춤에 더 신경을 쓴다.

심금을 울리는 좋은 가락보다는 눈길을 끄는 현란한 춤사위로 승부를 건다.

심지어 노래는 아예 녹음테이프를 틀어놓고 정작 가수들은 춤만 추기도
한다.

이른바 립싱크다.

이러니 노래가 노래다울리 없다.

인기 1위의 노래가 한주일을 넘기지 못하고 사라지는 것은 당연한 결과다.

뚱딴지 같이 가수타령을 하는 건 바로 요즘 경제부처와 경제정책의 모양새
가 그들과 크게 다르지 않아서다.

본업인 정책은 뒤로한 채 학계 쪽에서나 나올만한 경제원론이나 외고 있는
게 그렇다.

제도와 규정으로 대처해야 할 일을 기발한 묘책으로 돌파하려고 하는 것도
닮은 꼴이다.

참신한 대안이라며 내놓은 제도가 몇달도 못돼 존폐기로에 서고 경제계
전반의 지지를 잃고 있는 대목까지 희한하게 빼다 박았다.

기아사태가 일어난 뒤에 정부가 보여준 행적을 보자.

금융시장이 흔들리고 멀쩡한 기업까지 부도설에 휘말리는 데도 알아서
해결하라고 버텼다.

관련 은행에도 한은특융은 안된다고 잘라 말했다.

심지어는 협력업체도 지원할 수 없다고 부총리가 직접 발표하기도 했다.

WTO(세계무역기구)규정에 걸리는 데다 경영부실의 책임은 해당기업이 져야
한다는 논리였다.

지당한 얘기다.

무절제한 지원은 국제기준에 걸려 통상마찰을 초래하게 된다.

잘못을 저지른 쪽에서 책임을 지라는 데도 반론이 있을 수 없다.

경제학자가 이렇게 말했다면 고개를 끄덕였을 것이다.

하지만 부총리에겐 아니다.

"국제기준에 어긋나지 않는 대안을 다각도로 강구하겠다"고 말했어야 했다.

"기아그룹은 몰라도 협력업체의 부도는 무슨 수를 써서라도 막겠다"고
하는게 정답이었다.

진작부터 "은행도 자구노력을 보여준다면 돕겠다"고 했더라면 국제적인
신인도 추락과 환율폭등은 피할 수 있었을 게다.

무작정 안된다고만 하는 경제총수의 발언은 금융시장을 최악의 상황으로
몰고 갔고 해외에선 한국계 금융기관들의 크레딧 라인을 끊어버리게 했다.

경제총수가 "지원"은 고사하고 "수습"조차 안하겠다고 버티는 나라에
무엇을 믿고 돈을 대주겠느냐는게 국제 금융시장의 분위기였다.

정부가 나섰어야 할 일을 피한 결과다.

버티다 못해 대외부채 정부보증, 외화 및 한은특융제공, 협력업체지원
등의 대책을 들고 나왔지만 이미 기업과 시장은 엄청난 상처를 입은 뒤다.

그나마 까다로운 조건을 달아 받아들이기도 어렵게 해놓았다.

그런가 하면 나서지 않아야 할 일엔 억지를 부려가며 끼어들어 시장
메커니즘을 구겨 놓았다.

급조한지 넉달만에 부도위기에 처한 "부도유예협약"이 그 사례다.

부도를 내지 못하게 하자 종금사들은 앞다투어 여신을 회수, 오히려
부도를 촉발시키는 부작용을 불러왔다.

일부기관에만 의사결정권을 주어 금융기관간의 불신만 키워놓기도 했다.

결국 보완 내지는 폐지검토에 이르게 됐다.

기업퇴출이라는 제도에 의해 맡기는게 정도였다.

시장논리를 존중해야 할 때는 이를 무시한 채 뛰어들고, 시장논리에도
불구하고 나서야 할 때는 알아서 하라고 빠지는 정부.

긴 안목으로 차분하게 제도화할 일엔 현란한 묘안을 만들어 들이밀고,
시급하게 불을 꺼야 할 때는 논리를 따지는게 우리 경제부처의 수준이다.

댄스그룹들은 춤만 춘다는 비난이 일자 적어도 립싱크는 그만 두었다.

한데 우리의 경제부처는 여전히 딴청이다.

범을 그리려다 잘못하면 개가 된다는 말이 있다.

원칙도 중요하고 논리도 필요하지만 그럴 때가 있고 아닐 때가 있다.

(한국경제신문 1997년 8월 29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