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우규 <선경경제연구소 부소장>

나라마다 저력을 발휘하는 독특한 스타일, 제도 내지는 문화가 있고 긴
세월이 흘러도 잘 변하지 않아 유전적 특질이라 할 만하다.

이는 대내외 여건이 변화할 때 그 나라의 유기체적 행동양식이
자기파괴적인가 자기창조적인가를 결정한다.

따라서 이를 안다면 그 나라의 경제적 장래나 위험도를 추측해 볼수
있겠다.

예를 들어 미국은 상품및 서비스시장에서는 물론 노동시장에서도 경쟁이
갈수록 치열하게 체질화되어가는 나라다.

멕시코와 인접한 지역에서는 청바지공장의 임금이 10년전과 변함없다는 데
놀라게 된다.

그나마 북미자유무역협정(NAFTA)이 체결된 후에는 이들 공장이 멕시코로
이전되어 하루아침에 정리해고가 이뤄지는 문화를 가지고 있다.

물론 대규모 제조업체나 금융기관 등에서는 구조적이 아닌 순환적
경기하강국면에서도 대폭적인 정리해고가 당연시된다.

더 나은 생존을 위해서 끊임없이 자기변화를 추구하여 새로운 자기를
창조해나가는 나라, 미국이 경쟁력을 잃는다는 것은 당분간 상상하기 어렵다.

일본은 개인보다는 조직을 위해 단결하는 문화적 특성을 가지고 있으며
어려움이 심할수록 더욱 강하게 변하는 것을 보여왔다.

세계 3위의 자동차 업체인 도요타사는 최근 해외의 생산능력을 20%
확충하자마자 앞으로 수년내에 매출액 대비 수익성을 두배로 올릴 계획을
발표하고 이를 달성하기 위한 각종 개혁조치들을 마련하고 있다.

85년의 플라자 합의 이후 1백20%에 가까운 엔화 강세를 손쉽게 극복한
것도 놀랍지만, 그 여세로 세계 1위로 부상하겠다는 공개적 야심에 세계
자동차 업계가 두려움에 가까운 반응을 보이는 것은 "일본은 할수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예상보다 빠르게 진행되고 있는 금융 빅뱅이 어느정도 마무리되면 일본은
현재의 복합 불황을 극복하고 제조업에서는 물론 금융산업에서도 과거보다
훨씬 더 강력한 국가로 일어설 것이 확실하다.

우리나라 국민은 열정적이며 타협보다는 소신을 높이 평가하고, 실리보다는
명분을 중시하는 경향이 있다.

이러한 문화에서는 자의에서든 타의에서든 설득만 되면 한군데로 역량이
결집되기 쉽다.

과거 군사정권하에서 잘 살아보자는 구호 하나로 엄청난 경제성장을
이룩하는 자기창조를 해왔다.

그러나 갈등이 생기면 이러한 소신중시 명분중시의 사회에서는 자기파괴적
행태가 나타나기 쉽다.

87년부터 분배개선 형평성제고 민주화 등의 명분으로 포장된 자기파괴적
노동운동열풍이 전국을 휩쓸었다.

10년도 안되어 우리 자동차3사의 평균 노동비용이 미국 자동차회사와
맞먹을 정도로 전반적인 임금수준이 급격히 상승하였다는 것이다.

그 결과 이미 경공업 기반이 빠른 속도로 무너져 버렸음은 물론
중화학공업과 금융업종에서도 생존을 건 구조조정 압력을 받고 있는
실정이다.

최근 노동법이 전향적으로 개정되었고,경기침체 탓에 자기파괴적
노동운동은 수그러들었다고는 하나 아직도 상호 협력적이거나 자기양보적,
나아가 자기창조적 노동문화가 성숙되어가고 있다고 보기는 어렵다.

기아그룹 문제만 해도 아쉬운 점이 많다.

"시나리오설"등이 제기되고 있는 것은 안타까운 일이지만, 기아그룹의
노사가 강도높은 자구노력을 실천해 나가는 자기창조적 모습을 보이는
것만이 스스로의 생존을 위해 가장 시급한 일이라고 이해하는 사람이
많다.

현재의 기아그룹 위기가 기아특수강의 투자실패,기산및 아시아자동차의
부실 이외에도 올해 상반기에 모기업인 기아자동차의 시장점유율 하락과
적자반전에 크게 기인한다고 본다면 부도유예가 아니었어도 구조적인
자기개혁이 필요한 시점이라 할 것이다.

현재의 금융위기는 부도유예협약의 자기파괴적 요소를 방치한 것이 한몫
했다는 지적이 많다.

즉 부도유예협약으로 부실채권 회수에 상대적으로 불리하게 된 종금사및
여신전문 기관들이 부실리스트기업 채권의 표적 회수에 나섰고, 이는
기업도산과 부실채권을 양산하여 다시 금융기관에 자기파괴적 부베랑으로
되돌아왔다는 것이다.

정부가 부실 은행은 물론 종금사에도 한은특융과 외환지원을 다짐한
것은 늦은 감은 있지만 적절한 대응이라고 할만 하다.

그러나 사태가 장기적으로 호전되기 위해서는 기아와 협력업체의
자구노력을 돕기 위한 진성어음및 수출어음 할인 등이 지원되어야하며,
부도유예 혹은 부도처리된 기업들을 신속히 정리하여 실물경제의 불확실성
지속에 따른 불안심리를 진정시켜야 한다.

무엇보다도 부실 금융기관과 부실기업이 고용조정 자산조정 인수합병
기업분할 등을 통하여 자기창조를 할수 있도록 정부가 법적 제도적 장치를
정비해 줌으로써 현재의 위기를 전화위복의 계기로 만들어 나가야 할 것이다.

(한국경제신문 1997년 8월 29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