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편 박팽년이 문과에 급제하던 갑인년은 나라에서도 세종의 문치가 극성을
보여 4월10일에는 회암사를 크게 중창하고, 5월24일에는 전국지도를 정밀하게
그려 올리게 하며, 6월7일에는 자격수차를 제조 실험해보고, 7월2일에는
갑인자를 새로 주조해내며, 10월2일에는 해시계인 앙부일구를 경복궁 혜정교
와 종묘 앞에 설치한다.

김종서가 함길도 관찰사로 내려가서 북변확장 정책을 본격적으로 추진해
나가기 시작하는 것도 이때의 일이다.

왕실에서도 경사가 있어 막내 대군인 영응대군 염(1434~67)이 4월15일에
탄생하는데 이때 소헌왕후 심씨의 나이 40세이고 세종은 38세였다.

나라와 왕실이 모두 이와같이 태평성세를 누리고 있을 때 박팽년 일가의
영화와 경사도 그 극에 이르렀으니 박팽년의 조부모가 전의 본가에 모두
생존해 있었고 박팽년의 부친 박중림은 세자 시강원 우보덕(종 3품)으로
왕세자의 사부가 되어 왕세자의 교육을 직접 담당하고 있었으며 3월9일에는
박팽년이 18세로 문과에 급제하여 집현전 정자(정 9품)에 제수되고 6월26일
"통감훈의" 찬집관을 선정할 때 최연소 찬집관으로 발탁된다.

한편 2월14일에는 박중림의 재종숙에 해당하는 김종서가 함길도 관찰사로
내려가고 2월28일에는 박중림의 장인, 즉 박팽년의 외조부인 김익생이 부사가
되고 박중림의 외삼촌인 김익정이 정사가 되어 함께 정조사로 명나라에 다녀
오는 영광을 누리며, 9월2일에 김익정은 한성부윤이 되고 10월30일에는
김익생이 충청도 도절제사가 되어 고향으로 금의환향하며 11월16일에는 다시
예조참판 김익정이 성절사 정사가 되어 명나라로 사신이 되어 간다.

그리고 세종 17년(1435) 을묘 3월21일에는 성절사로 명나라에 갔던 김익정이
돌아오고 3월27일에는 함길도 관찰사로 내려가 있던 김종서를 함길도 병마도
절제사를 삼아 북변확장을 전담하게 한다.

이러는 가운데 6월8일에 "통감훈의"의 찬집이 완성되자 찬집관 전원을
경회루 아래에 모아 놓고 연회를 베풀어주는데 이곳에 부자가 함께 참여한
이는 세자 우보덕 박중림과 집현전 정자 박팽년 부자밖에 없었다.

이때 찬집의 총책임을 맡고 있던 예문관 대제학 윤회를 비롯하여 연회에
참석한 문신들로 하여금 시를 짓게하여 시축을 만들고 승지 권채(1399~1438)
로 하여금 그 서문을 짓게 하였다 하니 당연히 박중림.박팽년 부자의 시도
그 안에 들어있었을 것이다.

6월29일에는 경상도 관찰사 김효정이 예문제학이 되어 상경하고 그 자리를
김익정이 대신 맡아 내려가며 정인지는 충청도 관찰사가 되어 내려간다.

그리고 8월24일에 형조참판 남지가 성절사로 명나라에 가게 되자 세종은
명 조정에 "호삼성음주자치통감", 조완벽의 "원위", 김이상의 "통감" 전편,
진경의 "역대필기", 승상 탈탈이 지어 바친 "송사" 등을 보내줄 것을 요청
하고 만약 명나라 예부에 이런 책들이 없다면 사적으로 사오기라도 하라고
이른다.

뿐만 아니라 오경이나 사서, "성리대전"및 후대인이 편찬한 사서가 있다면
사오고 "강목"이나 "서법", "국어" 등도 있으면 사오되 모든 책은 반드시
두벌씩 사서 혹시 있을지도 모르는 탈락에 대비하도록 하라 명한다.

정녕 독서와 학문연구를 제대로 해본 문예군주다운 세심한 배려이다.

그리고 "영락대전"의 간행 여부를 탐지하고 중국 활자인쇄기술을 자세히
알아보고 오게 한다.

우리 활자인쇄술과 비교하기 위해서였다.

이어 9월12일에는 주자소를 경복궁 안으로 옮겨오도록 한다.

금속활자 인쇄술을 진두지휘하기 위해서였다.

10월9일에 세종은 그 이유를 이렇게 말하고 있다.

"주자소는 처음 설립할 때부터 대궐안의 관청으로 삼아 관원을 보내고
감독하는 일을 모두 승정원으로 하여금 주관하게 하였는데, 관청이 대궐밖에
있어서 오가며 아뢰는데 지체되는 일이 많아 이미 대궐안으로 옮기도록 하여
승지 두 사람으로 하여금 주관하게 하고 그 옛날 주자소는 오직 목판만을
두어 교서관으로 하여금 관장하게 하였으며, 또 2품이상 문신 1인과 승지
1인으로 제조를 삼고 교서 교리및 하급관리 2, 3인으로 하여금 다른 업무를
없애고 이 일만 나누어 맡되 교체될 때는 해임하는 이유를 갖추어 기록하고
서로 인계 인수하는 것을 항식으로 하게 하였다"

그리고 10월25일에는 각도 감사에게 이런 전지를 내린다.

""성리대전"및 "사서오경대전"은 중국의 여러 선비들이 황제의 명령을
받들어 찬술한 책으로 선대 선비들의 여러 학설을 채집하여 절충하였으니
사실 성리학의 연원이라 배우는 사람들이 마땅히 먼저 강구해야 할 것이다.

태종황제(명성조)가 보내준 이후에 이미 목판으로 간행하여 주자소에
두었고 접때 신료들에게 인쇄하여 나누어준 것은 널리 펼치는 것을 기대해서
였다.

다만 외방의 각 관청및 향교와 궁촌 벽지에는 일찍이 한본의 수장도 없었을
터이니 시골의 뜻있는 선비가 비록 살펴보고자 해도 얻어볼 길이 없을 터이라
진실로 걱정이 되어 이제 각책의 권수를 동봉해 보내니 각 관청에 알리도록
하라"

이 어름인 10월 12일에 함길도 도절제사로 내려가 야인정벌에 골몰하고
있던 절재 김종서의 모친 성주 배씨가 돌아간다.

뒤이어 세종 18년(1436) 병진 1월26일에는 박중림의 큰 외숙인 형조참판
김익정이 따라 돌아간다.

1월29일에는 주자소에서 인쇄한 "이백시집"을 종친및 문신 5품이상에게
나누어 주는데 이것이 활판인쇄인지 목판인쇄인지는 알수 없다.

드디어 세종 16년 2월26일에 찬집 명령을 받고 시작했던 "훈의통감"이
만 2년만에 인쇄까지 완성되어 2월27일에는 문신들에게 인쇄된 책을 나누어
줄수 있게 되었다.

물론 갑인자로 불리는 아름다운 자체의 신주 금속활자로 인쇄한 것이었다.

이 일을 얼마나 강행하게 하였던지 그 총책임을 맡았던 윤회(1380~1436)는
과로로 쓰러져 책이 나온 것을 보고난 직후인 3월12일에 57세로 서거하고
그 아래 책임자였던 설순은 지난해 10월12일에 책의 완성도 보지 못한채
침을 잘못 맞고 돌아갔다.

어떻든 이 책의 찬집에 박팽년 부자가 찬집관으로 함께 참여하고 있었으니
이 책의 출판은 나라의 경사였지만 곧 방팽년 집안의 경사이기도 하였다.

이때 박팽년의 나이 20세였다.

"김대박이 영남으로 사명을 받들어 가는 것을 보내는 머리글"을 지은 것은
이 해의 일인데 윤회를 시호인 문도공으로 부른 것을 보면 그가 돌아가고
나서 시호가 내려진 이후의 일인 듯 하니 적어도 이해 여름 이후의 일이었을
것이다.

다시 4월4일에는 중국역사와 우리역사를 시가형식으로 읊은 "역대세년가"와
"동국년대"를 주자소에서 인쇄하여 반포하게 한다.

세종은 일찍이 초학자들이 역사의 흐름을 파악하지 못할 것을 걱정하여
윤회로 하여금 중국역사를 통관한 "역대세년가"를 짓게 하였었는데 이때
이조판서 권도에게 다시 우리 역사도 시가형태를 빌려 그렇게 연대순으로
읊어내게 하였던 것이다.

문화창달에 역사지식이 얼마만큼 중요한가를 정확하게 알고 있었던
세종대왕다운 교육정책이었다.

같은 맥락에서 7월 29일에는 집현전 부교리 이계전(1404~59)과 김문(?~1448)
에게 명하여 "자치통감훈의"를 참고하여 "강목통감훈의"(사마광이 지은
"자치통감"을 주자가 다시 요점 정리해 놓은 것이 "강목자치통감"이다)를
찬집하게 했던 것이 완성되자 강에 해당하는 내용은 진양(수양의 초호)
대군으로 하여금 새로 써 만들게한 대자 금속활자인 병진자로 인쇄하고 목에
해당하는 활자는 갑인자와 같은 옛 활자를 써서 인쇄하여 노안에도 볼수
있게 하였다.

세종이 이미 40세가 되어 노안현상이 나타나기 시작하였기 때문에 이런
배려를 하게 된 것이다.

이 책이 완성된 것이 3년만이라 하니 "자치통감훈의"의 찬집을 시작한 뒤에
곧바로 이의 찬집도 진행하게 하였던 모양이다.

이 일은 집현전 부교리 이사철(1405~56)과 수찬 최항 등이 참여하여 진행해
갔었던 모양인데 박팽년 부자도 참여하였을 가능성이 높다.

"통감훈의" 찬집의 부책임자이던 유의손(1398~1450)으로 하여금 이 서문을
짓게 하여 유의손이 여기에도 관여하고 있음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그 서문의 일단을 옮겨 세종대왕이 왜 이 책을 편찬해내게 하였는가 하는
이유를 밝혀보겠다.

"주문공(주희의 시호)의 "강목"은 "춘추(공자가 지은 노나라의 역사)"의
필법을 근본으로 하였으니 그 글은 역사이나 그 뜻은 경이다.

상감께서 집현전 부교리 이계전과 김문 등에게 명하여 이르시기를, "무릇
공부하는 방법은 경학을 근본으로 삼는 것이니 진실로 마땅히 먼저 해야
하지만, 그러나 다만 경학만 닦아 사학에 통달하지 않으면 그 학문이 넓지
못하다.

사학을 닦으려는데 "강목"과 같은 한가지 책이 없을 수 있겠는가.

접때 이미 "자치통감훈의"를 편찬하였기에, 또 이 책으로 말미암아서 "강목"
을 아울러 주석하여 후학들에게 혜택을 주고자 하니 너희들은 힘써 하도록
하라"

세종은 이 책이 크고 무거워 들고 보기 어려운 것을 감안하여 한권을
상.중.하, 혹은 상.하로 나누어 분책 인쇄해냄으로써 총 1백49권으로 나누어
놓게 하였다 한다.

평생 독서를 쉬지 않고 했던 학자 군주만이 해낼 수 있는 발상이었다.

이해 9월27일에는 충청도 관찰사 정인지가 부친상을 당하여 전승지 정분이
이를 대신하게 된다.

한편 왕실에서는 10월8일에 세종의 서장자인 화의군 영이 감찰 박중손
(1412~66)의 장녀를 맞아들이는 경사가 있었고 10월26일에 세자빈 봉씨를
폐출하는 불행도 있었으나 12월28일에는 양원 권씨를 세자빈으로 승격하여
책봉하니 이 분이 단종의 모후 현덕왕후 안동 권씨이다.

(한국경제신문 1997년 8월 22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