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순간부터 백옥자는 거의 실신할 것같이 되어 밥이 들어오는데도 수저도
못들고 멍청하게 앉아 있다.

한참을 맥을 놓고 있더니 앞으로 픽 쓰러진다.

"백사장님, 정신 차리십시오"

그는 그녀 앞에 동그라미를 그려보인다.

"이 손이 보이시지요?"

겁에 질린 그는 이 만남을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난감하다.

"백사장님, 정신 차리십시오"

그러나 어찌도 충격이 컸던지 백옥자는 그냥 멍청하니 가로누운채 웃지도
못하고 울지도 못한다.

정신이 나갔다는 것은 이런때 쓰는 말일까?

"병원으로 가실까요?"

"네, 그래주세요. 지금 나는 내가 아닌 것 같아요.

하얘요, 하얗다구요"

그는 상당히 비싼 점심값을 그녀의 백에서 꺼내 치른후 그녀를 둘러업는다.

"백옥자 여사, 병원으로 가시지요?"

그는 정말 당황한다.

이렇게까지 그녀가 자기에게 열중해 있었을 줄은 몰랐다.

그는 생각한다.

"만약에 단식원에 들어가 날씬해지면 당신을 위해 결혼을 다시 생각해
볼께요"라고 말하는게 좋지 않을까.

그는 본성이 그렇게 모질지 못 하고 인정스런 놈이다.

그는 백옥자를 데리고 근방의 정신신경과로 간다.

백옥자도 순순히 따라온다.

그러나 실어증에라도 걸린 듯이 다시 말을 못 한다.

얼굴은 백지장같이 하얗고 입술은 푸르다 못해 검은 빛이 돈다.

의사에게 사실을 대강 말하니까 급히 주사를 한대 놓는다.

가만히 누워있던 백옥자의 얼굴에 서서히 미소가 떠오른다.

"정신이 좀 드십니까?"

"네"

"갑자기 아무 것도 안 보이고 멍해지고 그랬지요?

교통사고의 후유증이 아직 완전히 낫지 않으셨습니다.

충격받을 일은 하지 말고 정양을 하셔야 됩니다"

"저 선생님요, 이런 몸으로 단식원에 들어가도 될까요?"

"글쎄, 그것은 무리일 것같습니다.

원래 봐주시던 의사선생님께 가셔서 좀 더 정밀진찰을 받으시지요.

지금은 응급처치만 해드린 겁니다"

의사는 난처해 했고 뚱뚱해진 백옥자는 미련한 돼지처럼 환멸스런 모습이다.

시계는 이미 한시를 넘어 있다.

"나는 돌아가야 될 시간입니다.

백사장님, 회사에 연락해서 운전기사를 오게 할까요?"

아무리 다급하지만 지코치는 백옥자를 위해 전화를 넣어준다.

"지코치 고마워요. 날씬해져서 나타날테니 다시 만나줘요.

오늘 고마웠어요. 신세 안 잊을 겁니다. 정말 고마워요"

(한국경제신문 1997년 8월 8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