표류 12일째.

기아자동차사태는 아직 수습의 가닥이 잡히지 않고 있다.

각계의 ''기아살리기 캠페인''이 날로 고조되고 있지만 정부는 여전히 팔짱을
끼고 있다.

마땅한 해법이 없다는 것이다.

과연 그럴까.

정부가 할수 있는 역할은 그토록 제한적이고 소극적이어야 할까.

한때 경영위기를 맞았던 세계적 자동차기업인 일본 마쓰다사의 회생사례를
통해 간접적으로나마 기아사태해결을 위한 해법을 찾아본다.

< 편집자 >

========================================================================

지난 70년대초 오일쇼크로 위기를 맞은 일본 마쓰다자동차(당시 동양공업)
의 경우는 정부가 은행을 통해 간접 지원함으로써 되살아난 대표적 사례다.

마쓰다의 회생 스토리를 보면 주거래은행인 스미토모 은행의 전폭적인
지원이 두드러져 보이지만 그 뒤에 숨은 일본 통산성 대장성 등 정부와
중앙은행의 후원 또한 무시할 수 없는 힘이었다는 걸 알수 있다.

마쓰다자동차가 위기에 빠진 것은 직접적으론 오일쇼크라는 외부 요인
때문이었다.

이 회사는 지난 67년 저공해의 로터리엔진을 개발해 어느정도 성공을
거뒀다.

그러나 73년 제 1차 오일쇼크가 발생하자 연료를 많이 소비하는 로터리
엔진의 인기가 떨어져 어려움을 겪게 된다.

더욱이 창업자의 손자인 당시 최고경영자가 석유 위기를 일시적 현상으로
오판해 주거래은행인 스미토모은행의 생산삭감 권고를 받아들이지 않은
것이 화근이 됐다.

이로 인해 74년말 이미 2천9백16엔의 채무를 진 상황에서 수출마저 감소해
경영전반에 타격을 입는다.

게다가 생산직 근로자들의 노동생산성이 도요타나 닛산의 3분의 2 수준으로
낮았던 것도 마쓰다를 더욱 어렵게 했다.

결국 마쓰다자동차는 적자누적과 과다한 빚으로 74년 파산위기에 처했다.

이같은 도산 직전의 마쓰다자동차를 수렁에서 건져낸 데는 스미토모은행의
역할이 컸다.

스미토모은행은 마쓰다자동차에 경영진을 파견해 은행관리에 들어가면서
대대적인 "마쓰다 살리기"에 나섰다.

계열 금융기관들로 하여금 마쓰다에 대한 대출을 확대토록 했고 긴급
구제자금으로 3백억엔을 알선했다.

또 채권단에 지급보증을 해줌으로써 대출금 회수를 자제시키고 연간
3천여대의 마쓰다 트럭과 승용차를 사주는 배려도 아끼지 않았다.

여기에 마쓰다의 부동산과 5천4백만달러에 달하는 유가증권도 매입했다.

이뿐 아니다.

스미토모은행은 마쓰다의 부품업체들이 납품가격을 인하하도록 유도하고
미국 포드사가 마쓰다에 25%의 지분을 출자해 자본제휴를 맺을 수 있도록
주선하기까지 했다.

물론 스미토모은행이 이처럼 대대적인 마쓰다 지원에 나설 수 있었던 것은
일본 정부의 보이지 않는 후원이 뒷받침됐기 때문에 가능했다.

일본 대장성은 무엇보다 스미토모은행에 암묵적인 지불보증을 해줘 은행이
부실기업 지원에 적극 나설 수 있는 분위기를 조성했다.

또 통산성은 포드의 출자를 위해 외국인 투자관련 법률을 개정하고 일본
자동차 산업이 도요타-닛산 중심으로 집중화되는 것을 막기 위해 당시의
자동차산업 통합논의를 불식시키고 마쓰다 구제를 지지했다.

히로시마 현정부도 로터리엔진 자동차의 매출확대를 통한 지방경제
활성화를 위해 공해방지법을 강화하기도 했다.

한편 마쓰다자동차도 은행과 정부의 지원에만 매달린게 아니었다.

뼈를 깎는 자구노력을 다했다.

이 회사는 74~76년 동안 주식배당금을 예년에 비해 20% 축소하고 공장
근로자를 3만7천명에서 3만2천명으로 13.5% 줄였다.

경영진의 봉급을 삭감하고 상여금을 동결했으며 5천명의 공장근로자를
세일즈맨으로 전환시키기도 했다.

결국 지난 70년대 쓰러지기 직전의 마쓰다자동차가 재기할 수 있었던
것은 정부의 암묵적 후원과 주거래은행의 전폭적인 지원, 회사 스스로의
자구노력이라는 삼박자가 맞아 떨어졌기 때문이라는게 전문가들의 공통된
견해다.

< 차병석 기자 >

(한국경제신문 1997년 7월 28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