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순 < 연세대 철학과 교수 >

"방송국 같은 기관부터 남녀차별을 유도하니 우리 사회에서 진정한 남녀
차별이 없어질수 있겠냐구" 아내는 아직도 씩씩거리며 흥분하고 있다.

일하는 아내가 우연히 라디오방송을 듣고 분개하는 연유는 대충 이러하다.

기업체 취업정보를 알려주고 회사소개를 간단히 해주는 프로그램의 한
대목에서 진행자가 "40세 이상이고 경리직이니 남자를 찾는 거겠지요"라는
말을 했다는 것이다.

하루종일 회사에서 불쾌해 하다가 결국 방송국에 항의전화를 했더니 그
프로그램 담당자가 오히려 여성을 배려하는 마음에서 쓸데없이 원서냈다가
시간, 돈 낭비하는 것을 막아줬는데 왜 그러느냐는 대답을 들었다며 자신은
소위 언론사에 근무하는 머리가 깨어 있는 사람들이 그러는데 질렸다고
분통을 터뜨렸다.

그러는 아내에게 "뭘 그렇게까지 하느냐"고 했지만 막상 내가 한국여성학회
의 세미나에 논평을 하기 위해 여성관련자료를 찾다보니 아내가 흥분할만
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교육부 집계에 따르면 4년제 대학교 졸업여성의 취업률은 계속 높아지는
추세라고는 하나 아직도 졸업생의 반정도밖에 안되고 남자졸업자와 비교하면
20%정도 차이가 난다고 한다.

1백대 기업만 해도 전체 대졸사원의 7.5%만이 여자라는 한국여성개발원의
조사결과도 있다.

OECD 가입국인 대한민국에서 여성의 취업률이 왜이리 낮아야만 하는가.

그것은 전통적인 가부장제와 모든 모성보호비용을 전적으로 사용주에게
부담시키는 현행제도가 여성취업을 막고 있기 때문이다.

남성중심사회를 유지하다보니 여성의 사회 진출이 강제적으로 제어되고
뒤늦게 여성인력을 활용하려고 해보니 이미 모든 사회 구조가 남성위주로
돌아가고 있어 여성인력이 어이없게 사장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왜 기업체에서 여성의 취업을 기꺼이 받아들이지 않는가도 생각해
보아야 한다.

여자를 뽑아 2~3년 열심히 훈련시켜 일을 알아서 할 때쯤 되면 그만두니
뽑기 싫다는 것이 기업체의 변이다.

도대체 여성들은 모두 2~3년 일할 생각으로 취업을 하는가.

그것은 아닐 것이다.

요즘같이 남성혼자 벌어서는 집 한칸 마련하기 힘든 때, 배우자의 취업은
여러면에서 도움이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취업여성이 일을 그만두어야하는 상황은 바로 가정과
사회가 여성의 "슈퍼우먼화"를 바라고 있기 때문이 아닌가 싶다.

회사일은 회사일이고 집안일은 전업주부와 다름없이 완벽히 해내야 하며
육아도 흠집없이 해내야 하는 부담이 전적으로 여성에게만 지워지는데
문제가 있는 것이다.

학교 졸업후 지금껏 직장일을 하는 내 아내는 가끔 가사일에 치이면 툴툴
거리면서 이런 말을 한다.

"우리나라는 절대 제대로 된 여성장관이나 최고경영자가 나올 수 없어,
아주 경제적인 여력이 있어서 집안일과 육아를 모두 남에게 맡겨 놓지 않는
이상에야"

그렇다.

여성채용확대도 중요하지만 여성이 직장인으로서 중추적인 임무를 할수
있으려면 탁아소나 유치원을 국가에서 보조해 주는 등 취업활동을 지원하는
인프라를 구비하여 여성이 사회생활을 하는데 따르는 경제적 부담을 경감
시켜 줘야 한다.

전국 민간가정보육시설연합회가 2005년까지 취학전 아동의 무상교육 1백%를
이루기 위해 관계기관에 건의서를 보내고, 정부에서도 출산휴가비용과
육아휴직비용을 각각 의료보험과 고용보험에서 지원하여 사용주가 여성채용
을 꺼리는 이유를 근본적으로 없애는 방안을 추진중이라 하니 반가운 일이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고등교육을 받은 여성인력활용을 외치고 있으나 막상
그러한 여건을 만들어주는데 인색한 남성들이 가정에서 조금씩 양보하고
여성을 배려하는 것부터 시작해야 하겠다.

가사일에 하루 평균 22분밖에 할애하지 않는 우리나라 남성들.

오늘같은 주말 집안 청소할때 욕실 청소나 쓰레기 버리는 것을 남성 몫으로
정하면 어떨까.

(한국경제신문 1997년 7월 19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