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종 31년(1449) 기사는 성삼문이 32세 되는 해이다.

이 해에 명의 정통황제, 즉 영종은 환관 왕진의 꾀임에 빠져 달단의
와랄야선을 친정하러 갔다가 8월 15일에 대동부근 토목보에서 포로가 되는
엄청난 실수를 저지른다.

그래서 9월 6일에는 아우인 성친왕이 황제로 즉위하니 이가 경태황제
대종(혹은 경종)이다.

명나라는 대국의 체면도 체면이려니와 혹시 조선이 달단과 연합하여
명을 공격하지 않을까 하는 우려때문에 조선에 이 사실을 가능한한
숨기려 하였지만 사신의 내왕으로 이 사실이 탄로나자 오히려 9월
9일에는 요동지휘 왕무를 사신으로 보내어 10만 군사의 출병을 요구하는
선수를 친다.

이에 세종은 9월 19일 중국어에 능한 한성부윤(정2품) 김하(?~1462)를
정사로 삼아 사은사의 명목으로 명에 파견하여 왜인과 야인의 침공에
대비해야 하므로 파병이 어렵다는 사실을 통보하는데, 이 김하가 바로
성삼문의 처숙부였다.

명으로서는 애초에 파병을 기대하지도 않았으므로 조선의 제의를 쉽게
받아들여 세종32년(1450) 1월 13일 김하가 귀국하는 편에 전마 2만~3만 필로
대신하라는 조건으로 파병 요청을 철회한다는 칙서를 보낸다.

말 2만~3만필이라는 것도 지나친 요구였으므로 결국 세종은 말 5천필을
보내주는 선에서 명나라와의 우호관계를 유지하고자 한다.

이에 명나라에서는 조선의 비위를 맞추기 위해 세종32년 윤1월 1일에
한림학사 예겸과 형과급사중 사마순을 사신으로 보내어 신황제의 등극을
알리게 된다.

과거에는 대체로 본국 출신 환관들이 사신이 되어 왔었는데 이번에는
학식있는 선비들을 봉조사로 삼아 파견한 것이다.

조선을 예우한다는 사실을 표방하기 위해서 였다.

이에 조정에서는 김하와 공조판서 윤형(1388~1453)을 사신 접대역인
관반으로 삼고 집현전 학사들 중에서 가장 박학하고 시문에 능한 성삼문과
신숙주를 발탁하여 이들과 학문으로 교유하게 하였다.

이에 33세의 직집현전(종3품) 성삼문과 34세의 집현전 응교(정4품)
신숙주가 이들 두 사신들과 매일같이 어울리며 학문을 토론하고 시문을 주고
받게 되었다.

불과 20여일동안의 짧은 기간이었지만 이 과정에서 예겸은 성삼문의
풍부한 학식과 잘 생긴 용모에 반하고 충직하고 정의로운 성품과 호탕한
기개에 이끌려 그와 마음을 허락하는 친구로 사귀게 된다.

그래서 압록강까지 따라와 전별하는 성삼문에게 이런 애절한 이별시를
남기게 된다.

"바다 밖에서 서로 만나 곧 친구가 되니, 잔치하고 놀면서 담소하다가
매번 때를 넘겼지.

한가지 마음으로 즐겨 금란계(두 사람이 마음을 같이하면 그 날카로움은
쇠를 끊을 만하고 그 향기는 난초와 같다는 "주이"계사에서 유래한 말로
마음을 같이하는 친구 사이를 일컫는다)맺고, 함께 마시며 그 뛰어난 용모와
재주를 지나치게 사랑하였네.

감히 양웅(한의 대학자로 박학다식하였다)이 글자를 많이 안다 말하겠는가.

자우(공자 제자인 담대 멸명의 자, 의리에는 응하나 위협에는 불응하는
기개를 과시하는 말을 남겼다)가 말 잘하던 것도 잘 알고 있지.

강가에서 소매 나눠 떠나지 못해, 동풍에 말고삐 조이면서 이별을 원망만
하네"

성삼문이 화답한 송별시는 다음과 같다.

"서로 알던 그날 마음으로 아는 것 기뻐했는데, 이별 후에 상사는 얼마나
할까.

학령의 구름이 차가워져서 납설(동지후 제3의 술일인 랍일 전후에 내리는
눈, 즉 섣달 그믐께 내리는 눈)되더니, 압록강 물결은 이미 푸르러 봄
모습일세.

비단주머니 비게 되면 해노가 주워담고(당나라 이하가 명승지를 유람하며
시를 지으면 해노가 비단주머니를 가지고 따라다니다 이를 주워담았다는
옛얘기가 있다), 말술은원래 번쾌(한 고조의 공신, 천하장사로 무예가
뛰어나고 술을 잘 마셨다)가 사양하지 않았네.

천리 밖에서 공을 보내는 오늘의 마음, 남포의 한잔 술로 차마 헤어져
나눠가겠나"

예겸이 윤정월 초하루에 서울에 왔다가 같은 달 20일에 서울을 떠났으니
성삼문이 예겸을 압록강까지 배웅하고 서울로 돌아왔을 때는 봄빛이 완연한
2월 초순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성삼문이 서울에 도착한지 얼마 안되는 2월 14일에 병마에
시달리던 세종대왕이 격무를 이기지 못해 쓰러져서 2월 17일에 승하하고
만다.

집현전을 설치하여 자신들을 키워온 세종대왕을 잃게 된 집현전 학사들의
슬픔이야 누구나 다 마찬가지였겠지만 특히 성녕대군의 처가 집안으로
안평대군과 교분이 두터워 세종의 사랑이 남달랐던 성삼문의 경우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은 애통을 감내해야 하였다.

그러나 다행히 세종 못지않게 자신을 사랑하던 왕세자가 즉위하니
성삼문의 신상에는 큰 변화가 없게 된다.

오히려 새로 등극한 문종이 세종보다도 더 성삼문을 극진히 아껴 즉위년
9월 18일에 신정을 베풀면서 의정부와 이조 병조 및 승정원의 수뇌들로
하여금 승진시킬 인물을 천거하라 하였는데 성삼문의 이름이 빠져있자
도승지 이계전을 불러 "승진시킬만한 사람 중에 어찌 성삼문이 없는가"라고
힐책할 정도였다.

이에 이계전이 "성삼문이 쓸모 있는 사람이기는 하나 근일에 동료 박팽년
등이 항론상소할 때 그 말이 간절함을 꺼려서 핑계 대고 참여하지
않았으므로 지사기풍이 없다하여 여러 사람이 이를 그르게 여기므로
빼었다"고 대답하자 문종은 "박팽년의 상소가 잘못된 것이고 성삼문이
상소에 참가하지 않은 것이 옳은 일인데 어찌 이 일로써 그르게 여길 수가
있는가"라고 단호하게 성삼문을 옹호하고 나섰었다.

그래서 문종 원년(1451) 신미년부터는 국왕과 학문을 토론하며 정책을
의논하는 자리인 경연에 성삼문이 검토관의 자격으로 항상 참여하여 중요
정책 결정에 많은 의견을 개진하기 시작한다.

이때 성삼문의 나이는 34세였다.

그러나 다음해 문종2년(1452) 임신 5월 14일에 문종이 불과 39세의 젊은
나이로 오랫동안 앓아왔던 등창이 도져서 승하하고 마니 5월 18일에 겨우
12세밖에 안된 왕세자가 보위에 오른다.

지난 겨울에 문종은 병세가 위독해짐에 오래 살지 못할 것을 예감하고
집현전의 여러 신하들을 불러서 촛불을 밝혀두고 토론하다가 밤이 깊자
무릎 아래에 세자를 불러다 놓고 손으로 등을 어루만지면서 "내가 이 아이를
경들에게 부탁한다"고 한 다음 술을 내리는데 어탑에서 내려와 평좌에
앉아서 먼저 술잔을 들어 모두 한잔씩 권하였었다.

이 자리에는 성삼문 박팽년 신숙주 등이 모두 함께 있었으며 이들이
취해 쓰러져서 인사불성이 되자 문종은 환관들에게 문짝을 떼어 담가를
만들어 차례로 실어다가 집현전 입직청에 뉘어놓도록 하였다.

이날밤 마침 큰눈이 내렸는데 여러 사람이 깨어보니 기이한 향기가
방안에 가득하고 온몸에 담비가죽 이불이 덮여 있었다.

문종이 손수 덮어준 것들이었다.

이를 깨달은 여러 학사들은 서로 붙들고 울면서 남다른 은혜에 보답하기를
맹세했다고 한다.

"성근보선생집" 권3)

그래서 성삼문은 안평대군과 더불어 김종서를 도와 어린 왕의 보위를
지키기 위해 더욱 노력하게 된다.

그런데 단종 즉위년(1452)에 성삼문 집안에 뜻밖의 재앙이 닥쳤다.

지난해 8월 6일에 문종이 성승을 판의주목사(정3품)를 제수하여 의주를
다스리게 하였었는데 이해 8월 14일에 성승을 따라 내려간 군관인
오자경이란 자가 국상중 임에도 불구하고 관비를 간음하다가 아전인
김사염에게 발각당하자 오자경은 무안풀이로 도리어 김사염이 관비를 때리고
꾸짖었다고 성승에게 무고하였다.

사실을 모르는 성승은 군관의 말만 듣고 김사염을 매로 다스렸는데
6일만에 죽고 말았다.

이에 성승은 이 죄로 고신과 과전을 박탈당하는 벌을 받고 벼슬에서
떨려난다.

그러자 안평대군이 8월 21일에 성삼문 집을 찾아가서 술을 마시며 성승을
위로하고 임금께 아뢰어 이를 모두 돌려주게 하겠다고 말하였었다고 한다.

수양대군 일파가 성삼문과 안평대군과의 밀착된 관계를 과장하기
위해 "단종실록" 권2 단종 즉위년 8월 신사조에 기록해 놓은 내용이다.

여기서 안평대군은 이런 말도 하였다고 한다.

"혹시 변이 있으면 성승은 마땅히 나의 말 앞에 설 자이다"

안평대군의 주선 때문이었던지 다음해인 단종 원년(1453) 10월 2일에
성승은 충청도 수군도안무처치사로 제수되어 충청도 해미로 내려간다.

이 보다 앞선 4월 10일에 성삼문은 집현전 직제학(정3품 당하관)으로
승진하는데 이로부터 경연에서 시독관이나 시강관을 겸하게 되어 국정에
깊이 관여해오고 있었다.

그러나 안평대군을 비롯해서 김종서나 성삼문 등은 모두 법의 테두리
안에서 생각하고 도덕적 기준에 따라 행동하는 군자들이었다.

그러니 왕법을 물샐틈 없이 지키기만 하면 되는 줄 알았다.

그런데 수양대군은 대권을 탈취할 야심을 가지고 시정의 무뢰배들을
끌어들여 인륜 도덕을 도외시하고 으레 전장이나 왕법을 무시하는
무지막지한 행동을 서슴지 않았으니, 이를 당해낼 재간이 없었다.

결국 단종 원년(1453) 계유 10월 10일에는 수양대군이 늦저녁에 좌의정
김종서집을 찾아가 거짓으로 김종서를 유인해내어 데리고간 무사로 하여금
철퇴로 때려죽이게 하는 만행을 저지르고 어린 왕을 보호하던 의정부와
조정 요로의 중신들을 차례로 왕명으로 불러다가 살해하면서 거꾸로
안평대군이 모반하려 한다고 뒤집어 씌워 안평대군을 10월 18일 교동에서
사사하고 만다.

이때 안평대군의 나이 36세였으니 동갑인 성삼문도 36세 때의 일이었다.

(한국경제신문 1997년 6월 27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