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는 계산을 안 하고 살 수 없는 사고무친한 외톨이다.

경제적으로도 그렇고 정신적으로도 강력한 패트런이 필요한 처지다.

그가 제대로 사람구실을 하기 위해서는 언덕과 같은 바람막이가
필요하다.

그는 입술을 깨물면서 벌떡 일어선다.

"아가씨, 커피 잘 마셨어. 나는 지금 무엇보다도 사우나에 가야겠으니
삐삐나 알려주고 헤어지자구"

그는 과단성 있게 말한다.

울상이 된 미아는 생각한다.

이 정도로 놓아주는 것이 자존심을 지키는 최선의 선택이라고.

그녀는 예쁘게 자기의 삐삐번호를 써서 그에게 건네준다.

"오빠의 삐삐번호는 안 주어요?"

"나는 어머니외의 어떤 사람에게도 안 줘. 미안해"

지금 그 믿음의 어머니는 김영신이다.

그는 그렇게 단순하다.

그는 자기가 계획한대로 무섭게 치닫지만 그런 그의 외곬인 성격을
망치는 것은 언제나 헛된 욕심이다.

돈이다.

쇼핑중독과 호화스러움을 추구해온 허영이다.

울상을 겨우 감추고 있는 미아에게 싱그러운 미소를 날리면서 지영웅은
곧장 계산대 앞으로 걸어간다.

커피값을 지불한 지영웅은 호기롭고 경쾌하게 밖으로 나가면서 창피를
당해 홍당무가 된 미아를 돌아다보면서 손을 든다.

"바이바이. 오늘 커피 맛있게 마셨어"

그는 성큼 앞장선다.

그렇게 무례한 지영웅을 어처구니 없다는 듯이 멀거니 바라보고 서 있던
미아는, "10분도 못 가서 발병이나 나라" 하고 욕을 내뱉으며 씩 웃는다.

매우 복잡하면서도 비정하고 명쾌한 아가씨다.

치사하게 따라붙지 않아서 좋다.

"미안해. 다음에 만나면 국수 사줄께"

"안 만나게 되기를 바래요. 꼭 야생마 같잖아요"

"그래, 잘 봤어. 나는 그런 사람이야. 조심해야 되는 아주 사나운
흑곰이라구" 그는 여전히 야생마 같은 뒷모습으로 그녀의 시야에서
사라진다.

뭐 저런 인간이 다 있을까? 카를로스까지 온 것은 뭐며, 그렇게
몰인정하게 삐삐번호도 안 가르쳐주고 가버릴건 뭔가? 미아는 화가 나서
견딜 수가 없다.

역시 그는 공중을 떠도는 야생조나 야생의 말처럼 길들일 수 없는
남자일까? 떡대같은 상체의 곡선이 그녀를 사로잡는다.

그는 아폴로 같다.

정말 미스터리같은 오빠다.

잘 생긴 값을 하는 걸까? 그는 진짜로 그렇게 잘 난 남자일까? 미아는
돌아가는 발걸음이 천근처럼 무겁다.

이 남자의 정체를 언제나 벗겨버릴 수 있을까? 그녀는 지영웅을 집요하게
따라가다가 그가 사우나로 쓱 미끄러져 들어가자 신비한 구름속으로
사라져버린 은빛 같은 비행기를 놓쳤을 때처럼 아름다운 영상을 잃고
허탈해진다.

(한국경제신문 1997년 6월 9일자).